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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화 '죽은 나사로를 살림'. |
세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 "관속에 있을 때, 친구나 가족들에게서 어떤 말을 가장 듣고 싶었습니까?" 첫 번째 사람, "유능한 의사였으며 훌륭한 가장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는 "아주 좋은 남편이었으며 아이들의 미래를 바꾼 훌륭한 교사였다는 말입니다"라고 했다. 마지막 사람은 달랐다. "저는 딱 한 마디, '앗! 저 사람이 움직인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알파 유머집'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유머일 뿐, 당연히 그런 일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 당시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1장에 소개된 실제 사건으로 나사로라는 사람이 죽은 지 나흘이 지나 냄새까지 날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덤을 찾아가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부르자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에게는 기적일지 모르나, 예수님께는 상식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기적이 상식이 되어야 정상인 것이다.
100년 전 오늘날의 스마트폰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스마트폰을 보고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당연이고 상식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받아 창조되어진 인간들은 끊임없이 그 창조성을 발휘하여 과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100년 전 스마트폰이 기적이었다가 지금은 상식이 된 것처럼, 지금 기적이라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들도 인간의 과학이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 더 배워간다면 당연한 상식이 될 것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수명의 연장은 가능하지만 극복은 불가능하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러므로 죽음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잠은 짧은 죽음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착안하여 표현하면 '죽음은 조금 긴 잠'일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라고 표현한다(요한복음 11장 11절).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 앞에서 죽음은 의미가 없다.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는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죽음을 조롱한다. 신앙 밖에 있으면 죽음은 두려움이다. 그러나 신앙 안에 있으면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절차일 뿐이다.
예수님은 상식을 존중하시는 분이고 자신이 만드신 창조 질서를 존중하시는 분이다. 그런 분이 자신이 만든 창조질서를 깨뜨리면서까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다시 살린 이유가 뭘까?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으신 창조질서가 있기 때문에 죽음은 극복될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죽음은 축복이다. 단지 잠깐의 이별을 동반하기에 슬픈 축복인 것이다.
예수님은 오빠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긴 마리아를 향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장 25, 26절)"라고 물으신다. 그리고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라고도 말씀하신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은 지옥에 가야할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영생을 선물로 받은 사람에겐 죽음은 그 선물을 뜯는 절차인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그 선물이 주어지길 소망한다.
대연성결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