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팬들, 경기 망치면 ‘너그가 프로가’ 폭언
- 주눅든 선수들 폼 무너져 경기력 약화
- 김원중 한동희 ‘무관중 효과’ 선전 분석
- “선수들 분발하고 팬은 따뜻한 응원”
- ‘거인 레전드’ 염종석·박정태 조언
- 얇아진 지역 초중고생 풀 확충 숙제
야구는 순간 집중력과 1 대 1 수 싸움으로 풀어가야 하는 경기다. 작은 소음에도 흐트러질 수 있어 비슷한 성격의 스포츠인 골프나 테니스, 바둑은 경기 도중에 관중이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한다. 관중이 내는 소음을 제지하지 않는 야구는 팬들이 선수를 응원하고 적절한 동기부여를 해 경기를 이기게 만들 수도 있는 스포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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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0월 롯데 자이언츠 포수 김준태(왼쪽)와 내야수 오윤석이 경기 중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두 선수는 지난해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여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국제신문DB |
■못한다는 소리 못 듣는 지역 유망주
7회 말 3 대 5로 뒤지는 상황에서 원아웃 주자는 1, 2루. 안타 한 개면 동점까지도 노려볼 수 있는 승부처다. 타자는 낮게 깔리는 슬라이더에 방망이를 휘두르고 공은 2, 3루 사이로 떼굴떼굴 굴러 상대 팀 2루수와 1루수 글러브에 차례로 빨려 들어간다. 병살타. 응원석에서는 탄식과 함께 “너그가 프로가?”라는 말로 시작하는 온갖 욕설이 나온다. 타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더그아웃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롯데 자이언츠의 홈경기를 떠올리면 쉽게 연상되는 장면이다.
이 순간 ‘거인’은 마치 “비뚤어질 테다”고 선언한 10대 청소년으로 쪼그라든 듯하다. 왜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까. 스포츠 심리학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는 선수들이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려는 행동이다. 어린 시절부터 초특급 유망주로 대우받아 온 선수들은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패한 것보다, 재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더 부끄럽게 생각한다. 병살타를 치거나 헛스윙 삼진을 당하면 분통을 터뜨리기보다는 ‘이날 경기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하면서 자신을 기만한다. 이들은 팬들의 야유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일부는 지난해 한동희 이승헌 김원중이 자리를 잡아가는 이유를 ‘무관중 효과’라고 걱정하기도 했다. 이들이 관중이 없거나 매우 적은 2군 경기장과 별로 다르지않은 환경 속에서 경기를 치렀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 롯데 등 선수들의 심리상담을 해온 송봉길 멘털트레이너는 “경기는 팬들과 선수가 함께 하는 것”이라며 “‘내가 오늘 어떤 플레이를 하겠다’는 목표의식이 확실한 선수는 팬들의 야유에 별다른 영향을 안 받지만 이는 정말 소수다. 선수 상당수가 백색소음을 뚫고 나오는 욕설이 뇌리에 박혀 그라운드로 나가면 계속 그 단어가 떠올라 폼이 무너진다고 한다”고 말했다.
■폭언은 선수생명 꺾을 수도
오랫동안 부산 출신 프랜차이즈 스타가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이유는 바뀐 성장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부산이 ‘야구도시’라고는 하지만 수십 년간 인구가 수도권으로 몰리면서 최동원 주형광 박정태 염종석이 나왔던 시절만큼 초중고교 선수층이 두텁지 못하다. 이 때문에 지역 초특급 유망주는 성장 과정에서 별다른 경쟁자를 만나지 못해 ‘내가 가진 재능이 최고’라는 인식이 강하다. 개인적으로 노력은 했지만 상대 선수와 치열하게 경쟁할 계기는 적다는 점도 문제다. 반면 전국 초중고교 선수 60%가 몰린 수도권 출신 프로 선수들은 오랫동안 비슷한 실력의 경쟁자들과 경기를 치렀고, ‘내가 가진 재능이 최고’라는 인식도 상대적으로 덜하다.
롯데에서 선수와 코치 생활을 해온 이른바 ‘레전드’들은 선수들이 분발해줄 것을 촉구하면서도 팬들이 더 이해하고 품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선수층 확충 역시 장기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다. 롯데에서 투수코치를 맡았던 동의과학대 야구부 염종석 감독은 “지역 최고의 고교 선수들은 실력만 보면 그해 전국 최고라 봐도 될 정도다. 문제는 이 선수들이 프로에 와서 선배들과 비교하면 워낙 실력 차가 커 순식간에 주눅이 들곤 한다”면서도 “부산에서 성장한 지역적인 한계다. 선수들 스스로가 노력해야 하지만 팬들도 따뜻하게 응원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롯데에서 2군 감독과 1군 타격코치 등을 지냈고, 현재 유소년 선수를 육성하고 있는 아이엠제이티 박정태 대표는 “프로 경기에서 마운드나 타석에 나갔을 때는 선수 스스로가 경기를 풀어나가야 한다. 승부에서 이기려면 선수가 스스로 방법을 터득하고 순간의 변수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하는데, 경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했다.
권용휘 기자 real@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