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롯데 윤학길 전 감독 근성 받아”
- 위기마다 아버지 조언에 힘 얻어
- 윤 감독 “겸손 잃지마라고 당부”
한국 프로야구(KBO) 롯데 자이언츠 ‘레전드’ 투수 윤학길(60) 전 롯데 2군 감독은 요즘 2020 도쿄올림픽 펜싱 사브르 여자 단체전 경기 중계방송을 재방 삼방은 물론 경기 하이라이트 장면까지 매일 챙겨본다. 딸 윤지수(28·서울시청)의 활약을 보기 위해서다. 윤지수는 지난달 31일 열린 펜싱 사브르 여자 단체전 이탈리아와의 동메달결정전에서 패색 짙던 6라운드에 올라 무려 11점을 뽑아내는 폭발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고전하던 한국은 윤지수의 활약으로 주도권을 잡아 결국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윤지수는 앞선 헝가리와의 8강전에서도 8라운드 역전을 일궜다. 주변에서는 그가 아버지의 ‘승부사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극찬했다. 이에 대해 윤지수는 “100% 인정”이라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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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펜싱 여자 사브르 국가대표 윤지수(왼쪽)와 그의 아버지 롯데 ‘레전드 투수’ 윤학길 전 롯데 2군 감독이 5일 부산 자택에서 자신들의 종목을 상징하는 펜싱칼과 야구공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윤지수 선수 제공 |
윤지수는 부산 해운대구 양운중 재학 시절, 그의 뛰어난 운동신경을 알아본 체육교사의 권유로 펜싱에 입문했다. 운동하고 싶었던 딸과 달리 아버지는 처음에 심하게 반대했다. 운동선수로 느낀 고충을 딸이 겪지 않길 바라서였다. 윤 전 감독은 롯데 선수 시절 12시즌 동안 앞으로 깨지지 않을 100완투(117승 94패 평균자책점 3.33)를 기록한 전설이자 ‘마운드의 고독한 황태자’였다. 그는 199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당시 시범종목이던 야구 국가대표로 출전해 딸에게는 ‘올림픽 선배’도 된다.
윤 전 감독은 딸이 펜싱 입문 1년 만인 중학교 3학년 때 출전하는 국내 대회마다 우승하자 마음을 바꿨다. 그는 “사실 (지수가) 어려서부터 운동신경 하나는 뛰어났다. 뭐든 하나에 집중하면 포기하지 않더라. 그건 나를 닮았다”고 인정했다. 울산이 고향인 윤 전 감독은 초등학생 때 야구를 시작해 중학교 때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부산으로 옮겨왔다. 부녀 모두 운동 시작 직후부터 남다른 두각을 드러낸 셈이다. 윤지수는 이후 부산디자인고와 동의대 펜싱팀을 거쳐 태극마크를 달았다.
아버지는 요란하게 딸을 응원하지는 않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묵직한 조언으로 용기를 줬다. 윤지수는 후보선수로 처음 올림픽 단체전에 출전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서 5위를 기록한 후 ‘번아웃’으로 위기를 겪었다. 그는 “모든 걸 쏟아부은 대회였는데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다음 올림픽 출전에 대한 의지는커녕 펜싱칼을 보기도 싫었다”고 털어놨다. ‘차라리 다른 일을 펜싱처럼 노력해볼까’ 불안을 느낀 윤지수는 급기야 “선수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고, 딸의 마음고생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는 “힘들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이 시기를 흘려보내는 건 어떻겠냐”고 다독였다. 이 말에 힘을 얻은 윤지수는 다시 칼을 잡고 피스트(펜싱 경기장)에 섰다. 이듬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최초로 사브르 여자 단체전 은메달을 따내는 등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윤지수는 “아버지의 조언이 큰 힘이 됐다. 그때 위기를 넘기지 못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다”고 말했다.
윤지수는 이번 대회 동메달결정전에서도 마음고생이 심했다. 앞서 남자 사브르 단체전(금), 여자 에페 단체전(은), 남자 에페 단체전(동)에서 모두 메달이 나와 마지막 남은 여자 사브르 단체전에서도 좋은 결과를 거둬야 한다는 중압감이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로나19 탓에 경기가 끝난 선수는 48시간 이내 선수촌을 떠나야 한다는 대회 규정이 있어, 마지막 경기인 여자 사브르 단체전 때는 다른 동료가 모두 떠나 응원해줄 사람도 없었다. 윤지수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동료 없이 치르는 외로운 싸움이 힘들었다. 그건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승리 확정 후 이들은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듯 눈물을 터트렸다. 윤지수는 “고생한 동료들과 함께 획득한 동메달이라 더 뜻깊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윤지수가 동메달을 들고 부산 집으로 금의환향했을 때 윤 전 감독은 함박웃음으로 딸을 맞았다. 윤 전 감독은 “실력은 믿었다. 올림픽 두 달 전 무릎 수술 때문에 제대로 경기를 소화할지 걱정했는데 대견하다”며 마음을 놓았다. 딸은 아버지에게 동메달을 걸어줬고, 아버지는 “기분 최고”라며 딸을 껴안으면서도 “겸손한 마음 항상 잃지 마라”는 조언을 건넸다. 딸이 좋아하는 회도 함께 먹으며 자축했다. 윤지수는 “내년 열리는 항저우아시안게임부터 차근차근 준비할 것”이라며 “어느 대회에서 메달을 따겠다는 것보다는 조금씩 성장하는 선수가 되는 게 목표”라고 향후 계획을 밝혔다.
김미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