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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곤의 요기조아<5> 무주 구천동계곡에 英 신문재벌 부도가 있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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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무주 장수, 경남 함양 거창 등 2도 4군 8개 면에 걸쳐 있는 헌걸차게 뻗은 육산인 덕유산(德裕山)은 이름 그대로 덕성스러운 능선과 너그러움을 간직한 국립공원 봉우리다. 그렇다고 만만한 산은 결코 아니다. 한라 지리 설악에 이어 남한 땅에서 네 번째(1614m)로 높다.

 특히 눈이 많은 겨울에는 일종의 눈꽃인 상고대와 함께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닉네임을 지닌 구상나무와 주목의 운치가 한데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산꾼들에게 덕유산은 작은 히말라야로 불린다. 눈이 워낙 많은 데다 춥고 바람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똥바람’으로 악명 높은 소백산의 겨울바람이 가장 매섭다고 하지만 기자가 보기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만만찮다.

 눈, 스키장과 무주리조트, 그리고 상고대와 눈꽃 산행 덕분에 무주는 겨울 여행지로 각인돼 있지만 알고 보면 나라 땅 최고의 계곡으로 불리는 구천동계곡이 있어 사계절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무주리조트 곤돌라가 생기기 전의 덕유산 등반길은 십중팔구 구천동계곡에서 출발해 백련사를 거쳐 향적봉에 오르는 코스가 일반적이었다. 산행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삼공매표소에서 백련사까지의 구간은 삼림욕을 겸한 가족 산책로로 제격이다. 계곡의 길이는 무려 6㎞. 덕분에 나라에 큰 난리가 날 때면 민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덕성스러운 이곳 무주구천동으로 숨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편으로 구천동이라는 이름은 9000명의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거나 계곡이 9000굽이라서 명명됐다고도 전해온다.

 구천동계곡에는 33곳의 빼어난 풍광 ‘33경(景)’이 숨어 있다.

 삼공매표소를 통과하면 15경 월하탄부터 시작되며 나머지 1~14경은 구천동계곡 하류인 원당천을 따라 포진해 있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나제통문(1경) 백련사(32경) 덕유산 정상 향적봉(33경)을 제외한 나머지는 굽이굽이마다 모두 너른 반석과 크고 작은 소·담·폭포가 이어져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다.

 구천동계곡 탐방길은 계곡을 따라 산책하듯 편안하게 걸으면 제격이다. 녹음이 우거진 계곡 숲속에 들어서면 사바세계에서 찌든 삶이 눈 녹듯 사라진다. 가까이서 본 계곡물은 수정같이 맑고 깊다.

 인월담 사자담 청류동 비파담 등 작은 소와 담이 연이어 선경을 연출한다. 그림과 함께 명명된 사연도 눈길을 끈다. 폭포수가 달빛에 비치면 장관을 이룬다는 월하탄, 옛날 백련사를 오가는 스님들과 불도들이 쉬어가던 안심대, 2단폭포인 구천폭포 등을 거쳐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이속대. 이 이속대를 벗어나면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천년고찰 백련사에 이른다. 삼공매표소에서 백련사까지는 넉넉잡아 1시간이면 충분하다.



무주 백련사 입구 부도밭에 있는 영국 데일리메일 회장을 지낸 러더미어 3세(오른쪽)와 그의 장모 최낙순 씨의 회백색 부도.
부도 우측에 서 있는 작은 비석. 부도가 세워진 간략한 사연이 적혀 있다.
무주32경인 덕유산 백련사 일주문.


 백련사 입구에선 놓쳐선 안 될,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 쉬운 볼거리가 하나 있다. 일주문 옆 부도밭의 회백색 부도 2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영국 데일리메일 회장을 지낸 비어 러더미어 3세(1925~1998)와 그의 한국인 장모의 것이다. 이 산골짝에 벽안의 영국인 신문 재벌의 부도라니.

 사연이 이랬다.

 리더미어 3세는 뉴욕의 한 동물병원 후원기금 마련 행사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난다. 재일 한국인 2세로 오사카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이정선이라는 여인이다. 그는 이 씨와 운명처럼 바로 사랑에 빠졌다. 결국 그는 부인과 사별한 지 1년여 만에 이 씨와 결혼했다. 그는 장모인 최낙순 씨가 고향 무주 백련사의 독실한 불자여서 한국에 오면 장모와 함께 무주 32경인 이곳을 찾았다.

 덕유산과 구천동계곡의 풍광에 반한 그는 부인 이 씨에게 “내가 죽으면 내 유골의 반은 영국의 집 마당에 뿌려주고, 나머지 반은 백련에 남겨 달라”고 유언했고, 사위의 도움으로 장모 최 씨가 적지 않은 시주를 한 덕분에 백련사에 장모와 사위의 부도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부도 바로 옆 안내석에는 영국 자작 러더미어 3세와 그의 부인 및 장모의 사연이 간단하게 적혀 있다. 참으로 사람의 인연은 묘하고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부도가 조성된 1998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뒤늦게 그 사연이 밝혀지면서 국내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당시 언론은 러더미어 3세와 장모의 부도 조성 사연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외려 미망인의 상속액이 얼마였던 가에 기사를 더 많이 할애해 씁쓸함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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