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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동화 <26> 찐빵과 나팔꽃 씨앗

외로운 것들끼리 금방 친구가 되나 봅니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7-01-04 14:03:38
  •  |   본지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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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오순환


솥뚜껑을 열자 뭉클, 뽀얀 솜구름이 일어납니다. 지나던 겨울바람의 얼굴이 순간 화끈해집니다. 유 씨는 몽실몽실한 김 사이로 마치 꽃을 따듯 찐빵들을 꺼냅니다. 소복이 담기는 희고 보드라운 찐빵들이 국화송이 같습니다. 종종걸음 치던 사람들 눈빛이 잠시 환해집니다.

열 일곱 살 때부터 빚어온 찐빵입니다. 키도 작고 다리를 저는 유 씨는 무릎뼈가 여물 무렵 찐빵집에서 잔심부름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찐빵 만드는 것을 배우고, 찐빵집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칠십이니 오십 년 이상을 밀가루손으로 살아온 것입니다.

이 가게는 두 평 남짓한 옴팡집입니다. 오른쪽은 꽃집이고, 왼쪽은 베이커리입니다. 그 가운데서 찐빵집은 그릇선반에 잘못 놓인 녹슨 깡통처럼 보입니다. 양쪽 가게는 바뀔 때마다 자꾸 손질되고, 유 씨는 매양 찐빵만 찌다보니 그렇게 혼자 퇴색한 몰골입니다. 하지만 일부러 먼데서 오는 사람도 많을 만큼 맛으로 유명합니다. 화려한 생크림 케익과 향기로운 꽃더미 사이에서 찐빵솥은 이제 동네 명물이 되었답니다.

이곳은 역 앞이라 아침저녁 아랑곳없이 바쁩니다. 그저 쉼없이 몸을 놀려야 합니다. 하루에 쪄내는 찐빵이 이천 개가 넘습니다. 더 많이 만든 적도 있습니다. 찐빵솥 옆에서 허리가 굽긴 했지만 그나마 사람들 먹이는 일이니, 참 고마운 노릇입니다. 역 근처라 그런지 그냥 먹여보낸 이들도 수두룩합니다. 밤마다 밀가루반죽을 숙성시키고 진한 팥앙금을 만들고 낮엔 종일 찐빵을 빚고 쪄내는 일상. 그것이 노인의 하루이며, 생애 전부이며, 또 미래입니다. 그런 유 씨에게 사는 일은 아무리 복잡해도 밀가루 반죽 같습니다. 어떤 딱딱한 고통이나, 절름발이라는 벼랑도 유 씨 손끝에서는 하얀 찐빵으로 보송보송해지고 맙니다.

가게 앞은 대로변인데다 신호등이 있어 서로 비집고 드는 버스와 택시, 사람들로 언제나 붐비고 시끄럽습니다. 허나 뒤로 붙은 쪽문은 골목을 향해 있습니다. 골목을 끼고 몇몇 쪽방과 여인숙들이 지친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습니다. 쓰레기가 쌓이고 발걸음도 드문한, 한낮에도 고요하고 그늘진 골목입니다.

유 씨는 잠깐 마음이 헐렁해진 틈을 타서 뒷문을 열었습니다. 멍순이가 와 있습니다. 멍순이는 양 같이 생긴 개입니다. 버려진 녀석인데 하얗고 털이 긴데다 뚱뚱하고 어기적거리는 게 도무지 개 같지가 않습니다. 꼴이 하도 우스워서 주변에 물어보니 아파트에서 키우느라 성대를 잘랐는데 호르몬 이상으로 저렇게 변했을 거라는 겁니다. 짖지도 못하고 쉰소리만 내는 녀석이 찐빵솥 옆에서 밤을 지샌 건 지난 가을부터입니다. 이곳을 아주 제집으로 삼은 듯합니다.

똑똑이는 아직 안 보입니다. 똑똑이는 야생고양이입니다. 어디서 짤렸는지 꼬리를 잃어버려 그도 고양이치곤 영 폼이 나지 않습니다. 녀석도 유 씨의 찐빵을 좋아하는데 보기엔 신경질적이어도 참 순한 놈입니다. 멍순이를 개로 생각하는지 않는지, 함께 있는 걸 낯설어하지 않습니다. 이젠 식구들 같아 유 씨는 틈틈이 뒷문께를 내다보곤 합니다. 바쁘다가도 녀석들이 보이면 마음이 저절로 푸짐해지고, 보이지 않으면 괜히 허전해지는 유 씨입니다.

순호도 보이지 않습니다. 순호는 며칠 전 새로 사귄 친구입니다. 아홉 살난 순호는 지난 가을에 엄마를 잃고 골목 건너에 있는 둥지여인숙에 살러 왔다고 합니다. 졸지에 혼자가 되어 흘러온 야윈 모습이 물살에 떠내려온 나뭇가지처럼 안쓰럽습니다. 나흘 전 가게 근처에서 오래 얼쩡거리는 순호를 유 씨가 불렀습니다. 맑은 눈빛에 끌려 찐빵 하나 주고 싶어서였습니다. 멈칫대다 받아먹던 아이는 그후로 마치 갈 데 없는 바람처럼 찐빵집으로 매일 불어왔습니다. 웬 녀석인가 궁금해하는 유 씨에게, 설거지하던 아줌마가 귀띔해 주었습니다. 둥지여인숙에 온 먼 친척애라고. 오죽하면 이 누추한 골목으로 보내졌을까. 찡한 마음에 유 씨는 친한 체를 하며, 멍순이와 똑똑이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어제는 쓰레기통 옆에서 나란히 겨울햇살을 쬐고 있는 세 녀석을 보고 신통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로운 것들끼리 금방 친구가 되나봅니다. 그 풍경이 자꾸 마음 쓰여 유 씨는 오늘따라 뒷문을 자주 열어봅니다. 겨울엔 비닐까지 쳐서 꼭 닫아야 하는 문짝입니다. 종일 온기를 찾아 떠돌다가도 저녁나절이면 뒷문께로 찾아드는 그것들이 유 씨는 그저 가엾고, 또 고맙기도 합니다. 외로운 건 유 씨도 비슷합니다.

아들도 셋이나 되고 손주도 다섯이나 되지만 노인은 그 아이들을 일 년에 한 번 볼까말까합니다. 첫째네는 아주 이민을 가버렸고, 남은 자식들도 못 오는 이유가 많습니다. 명절날조차 스키 타러 가거나, 해외여행을 간다고 합니다. 손을 돕는 김 씨, 설거지를 맡는 박 씨 아줌마, 안면이 트인 단골들, 괜히 아는 체 너스레떨며 들락거리는 몇몇 노숙자들이 그나마 식구처럼 여겨집니다.



겨울해는 네 시만 되어도 식기 시작하는 게 일찍부터 쓸쓸합니다. 다시 문을 열어봅니다. 그새 순호가 와 있습니다.

"아이구, 우리 새 동무 왔구먼."

"똑똑이는 아직…… 안 왔어요."

"춥지. 어서 와라, 들어와."

빈 구석자리로 유 씨는 순호를 불러들입니다. 유난히 물기가 많은 아이 눈동자에 반짝, 별빛이 담깁니다. 순호는 들어가기 전에 멍순이 머리를 만져줍니다. 멍순이 얼굴에 따라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에 제가 들어앉을 자리가 없다는 걸 아는 영리한 멍순이입니다. 아주 밤늦게, 찐빵솥을 안에 들여놓을 무렵이어야 하며, 그리고 똑똑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노인은 잠시 순호 손을 잡아줍니다. 차가운 손이 한 마리 메추라기처럼 밀가루 묻은 손안에서 파닥입니다. 체온을 나누는 동안 온 세상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입니다. 살아있다는 건 이렇게 손잡는 순간, 사랑에 넉넉해지는 순간일 것입니다. 이내 김이 모락한 찐빵 세 개가 순호 앞에 놓입니다. 언제나 그랬듯 유 씨의 사랑은 찐빵으로만 표현됩니다. 찐빵이 데워줄 사랑과 삶이 노인에겐 늘 기적처럼 여겨집니다.

따끈한 보리차도 따르는 유 씨를 바라보다 순호는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합니다. 머뭇머뭇 하얀 종이를 꺼내 유 씨 앞에 내밉니다. 흰 봉투를 두세 번 접은 것입니다. 부끄러운 듯 약간 맹한 웃음이 입가에 흔들립니다.

"이거…… 할아부지."

"인석아. 이런 것 가져오면 안돼."

돈인가 싶어 유 씨가 나무라는 표정을 짓습니다.

"돈, 아닌데……."

손에 받아든 봉투의 감촉이 이상합니다. 노인이 구겨진 봉투를 펴서 털어보니 그건 새까만 잘 여문 나팔꽃 씨앗이었습니다.

"엄마랑 받아놓은 건데……. 똑같이 나누어 덜어온 건데……."

어린 목소리가 봄아지랑같이 아물거립니다. 쪼그려 앉아 엄마의 유품인 나팔꽃 씨앗을 나누고 있는 조심스런 손짓이 유 씨의 눈속에 떠오릅니다. 그 진지한 우정에 코가 매워집니다. 순호의 눈빛 같은 까만 꽃씨 속에서 연보라빛 맑은 나팔 소리가 울려옵니다. 씩씩하고 따뜻합니다. 이젠 식구 같아 유 씨는 틈틈이 내다보곤 합니다. 갑자기 하늘이 더 넓어집니다.

김 수 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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