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호 감독의 ‘파이터’(2020)는 클로즈업의 영화다. 근래 한국영화에서 클로즈업의 사용은 텔레비전 드라마 문법의 상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배우의 얼굴과 대사의 전달을 위해 남발되는 클로즈업은 드라마의 이야기를 운반하고 배우 외모의 근사함을 전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낭비되어왔다. 이 영화는 다르다.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이나 ‘얼굴들’(1968)이 그랬던 것처럼, 연출의 명확한 의도 아래, 주제의 형상화를 위해 활용되는 클로즈업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언어가 될 수 있음을 ‘파이터’는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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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이터’ 스틸컷. |
수직적 높이가 강조되는 1.85:1 화면비는 배우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프레임을 꽉 채우기 알맞다. 감독은 클로즈업의 전격적인 활용과 비율의 선택을 통해 가급적 비어있는 공간의 여백을 줄이고 관객의 시선을 배우의 얼굴에 맞추려 한다. 스크린의 좌우 시야각을 제한하는 이러한 프레이밍은 미세한 표정의 결을 두드러지게 하고 좀 더 인물의 감정에 집중케 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파이터’에서 감독은 배우의 연기와 이를 통한 심리의 묘사로 극을 풀어가려는, 보다 직선적이고 투박해 보이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는 배경 미장센과 조명, 색채의 톤을 통합적으로 조율한 전작 ‘뷰티풀 데이즈’(2017)와 스스로 거리를 두려는 의식적인 자기 변신으로 보인다.
진아(임성미)는 남한 사회에 정착한지 겨우 5개월 남짓한 탈북자이다. 먼저 탈북한 어머니는 귀순해 새 가정을 꾸렸고, 뒤이어 남한으로 건너오려던 아버지는 중국 공안에게 붙잡힌 상태. 그가 만나는 대상은 일자리를 주선해준 브로커 아니면 스토커처럼 찾아와 치근덕거리는 부동산업자뿐이다. 믿고 의지할 일가족이 곁에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 카메라의 초점을 인물에 밀착시키는 촬영 방식은 영화의 이야기와도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진아의 얼굴로 화면을 채우고, 때론 여백이 있더라도 방 한 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는 모습을 포착하는 등 좀처럼 진아 곁에 타인이 들어올 자리를 비워주지 않는 카메라는 탈북자로서 외부 환경과 고립되고 차단된 인물의 폐쇄적인 심리를 전달하는데 크게 주효한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대담한 결정인 동시에 위험한 도전이다. 배우에 대한 감독의 전적인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전적으로 배우의 연기에 영화를 맡기는 만큼 이에 부응하는 배우의 역량이 맞물리지 않으면 전체가 붕괴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임성미 배우는 이 부담스러운 과제를 거뜬히 감당해낸다. 오롯이 배우 한 사람의 힘으로 영화 전체를 거뜬히 지탱하고 끌고 가는, 근래 한국영화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연기의 순간이 이 영화에 있다.
복싱에 관심을 갖게 되고 주변과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진아를 둘러싼 영화의 프레임은 점점 확장된다. 다른 인물과의 상호작용을 포착하는 투 앤드 쓰리 샷의 활용 빈도가 중반을 넘어서 확연히 늘어나고 종국엔 해변에서의 와이드숏으로 시원한 해방감을 안겨준다. 진아는 더 이상 이질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우리 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갈 이웃이 되었음을 영화는 암시한다. ‘히치하이커’(2016), 다큐멘터리 ‘마담 B’(2016)와 ‘뷰티풀 데이즈’로 분단 현실과 탈북민의 문제를 줄기차게 다루어왔던 윤재호의 작가주의는 여기서 완숙한 면모를 선보이며 필모그래피의 한 변곡점을 찍는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