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의 말미에서 헤밍웨이는 호기롭게 ‘사람은 파괴될 수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고 썼다. 청새치와의 싸움이 비록 육신을 망가뜨리고 피폐하게 했을지언정, 정신만큼은 결코 무너뜨리지 못했음을 웅변하는, 산티아고 노인의 이 말 한마디에는 역사 현실의 질곡에 처해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불굴의 인간 정신을 긍정하고자 했던 헤밍웨이 문학의 휴머니즘이 응축돼 있다. 그러나 문학적 수사를 떠나서 현실의 노인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동명의 원작 연극을 쓴 극작가 플로리안 젤러의 영화 데뷔작 ‘더 파더’(2021)는 이제까지 정형화되고 도구화돼 왔던 노년의 이미지를 파괴하며 외면해온 현실의 조각을 스크린에 펼쳐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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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파더’ 스틸컷. |
영화는 아버지를 만나러 집으로 향하는 딸 앤과 음악을 듣고 있는 아버지 안소니의 모습으로 막을 연다(이때 안소니가 듣고있는 곡은 헨리 퍼셀의 오페라 ‘킹 아더’의 ‘너는 무슨 힘으로(What power art thou)’로 메인 테마곡처럼 자주 활용된다). 자신이 잃어버린 시계를 두고 간병인이 훔쳤다며 남탓을 하는 아버지에게 딸은 애인이 거주하는 프랑스 파리로 떠날 것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신원불명의 남자가 자신을 앤의 남편이라고 설명하는가 하면, 파리로 떠난다는 딸은 집에 돌아와 있고, 요양사는 사고로 잃은 둘째 딸을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종국엔 다른 모습으로 등장해 안소니를 당혹스럽게 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허상인지 구별되지 않는 혼란 속으로 끌어들이는 영화의 진실은 종국에 가서야 밝혀진다. 안소니는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었고, 요양원 생활을 한 지 꽤 시간이 흐른 상태였다. 딸은 애인과 함께 파리로 떠나 주말이 되면 면회하러 오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치매 증상이 심해짐과 동시에 딸에 대한 그리움 또한 깊어진 안소니는 요양원 간호사를 딸과 사위로 혼동하는 지경에 이른다. 영화 전체가 실은 치매 증상을 겪는 안소니의 주관적 시점에서 보이는 심상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던 것. 남은 건 ’대부‘(1972)의 위엄에 찬 신화적 가부장도, ’일 포스티노‘(1994)의 자애로운 멘토도 아닌, 잎사귀가 떨어져 말라가는 나무처럼 무너져가는 노인의 초라함 뿐이다. 심리 스릴러의 장르적 화술로 밀도 있는 긴장감을 유지하던 영화의 결말은 착잡한 상념에 사로잡히게 한다.
고대 로마의 극작가 테렌티우스는 희곡 ‘포르미오’에서 “늙음은 그 자체로 병이다(Senectus ipsa est morbus)”고 한 바 있다. 의학의 발전은 노년기의 연장일 뿐, 신체가 허약해지고 기억력이 쇠퇴하는 늙음의 현실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환상을 보고, 본래 살던 집에 집착을 보이는 안소니의 모습처럼, 노인들은 살아온 삶의 터전과 주변의 인간관계를 떠나고 싶지 않아 한다. 늙음은 자연스러운 필연이며, 노인을 요양원으로 보내는 식으로 삶의 영역에서 몰아내는 게 당연시 돼선 안된다.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한국사회에 ‘더 파더’가 시사하는 메시지는 작지 않다. 늙음의 불가역(不可逆)성을 인정하면서 세대 간 ‘섞임’의 삶을 지향하는 방향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일이 진정 어려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