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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역사의 상처 보듬는 성숙한 멜로

영화 ‘빛나는 순간’

  • 조휘재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1-06-16 19:30:56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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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옥(고두심)은 70세 평생 물질로 생계를 꾸려온 제주도 해녀이다. ‘당신의 얼굴’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다큐멘터리 PD 경훈(지현우)은 지역을 대표하는 명물 격 인사인 그녀의 삶을 취재하고자 서울에서 제주도로 내려온다. 주위를 맴도는 경훈을 진옥은 못마땅해하고, 그런 진옥의 마음을 풀어주고자 경훈은 매니저를 자칭하며 이런저런 일을 돕고 다닌다. 오가며 서로에게 미운정 고운정이 든 두 사람의 관계는 통념을 벗어난 의외의 양상으로 발전한다.

   
‘빛나는 순간’ 스틸컷.
‘빛나는 순간’(2020)의 줄거리는 얼핏 단순해 보인다. 외지 사람이 지역에 내려와 그곳에서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현지에 동화된다는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다른 드라마나 영화로 숱하게 만들어져온 플롯이라 가벼이 넘길 수 있다. 그러나 서사의 전형성은 단지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담기 위한 그릇일 뿐이다. 제주도 현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구멍투성이의 현무암 돌덩이처럼, 소준문 감독은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의 사이에 비어있는 여백의 공간들을 전혀 통속적이지 않은 것들로 채워 넣는다.

영화의 카메라는 바다를 마주한 해안 마을의 고즈넉한 풍광을 와이드 숏으로 담음과 동시에 풀샷을 통해 인물들의 생활과 정서의 결들을 훑는다. ‘빛나는 순간’의 영상 문법은 클로즈업을 남발하며 최소한의 내러티브 전달이라는 극적 기능성에만 매달릴 뿐, 어떠한 정서의 조각들,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 속 인간의 생동감과 예술적 잉여를 창조해내는 데는 실패하는 근래 한국영화 일반의 경향에서 이 영화는 몇 발짝 떨어져 있다. 풍경이 곧 사람이고 사람이 곧 풍경이다. 많은 걸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보여지는 공간의 이미지와 침묵을 통해 그 안에 살아있는 인간들의 내면을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영화의 결정적인 순간은 경훈의 카메라 앞에서 진옥이 과거사를 토로하는 장면에서 찾아온다. 배우 고두심 혼자의 힘으로 끌고 가는, 장장 6분에 달하는 클로즈업 롱테이크에 이르러서야 관객은 섬마을 사람들이 갖는 외지인에 대한 미묘한 거부감의 이면에 어떠한 역사적 기원이 은폐되어 있었는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영화예술에서는 때론 보여주지 않는 것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고 많은 심상을 자아내는 순간이 있다. ‘5일의 마중’(2014)에서 장예모는 단 한 순간도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을 재현하지 않았지만, 관객은 영화 속 현재만으로도 역사의 파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명시하지는 않지만 ‘빛나는 순간’도 4·3사건과 같은 근현대사의 굴곡을 배우 한 사람의 빛나는 연기 속에 함축해낸다.

   
해상사고로 연인을 잃은 과거를 가진 경훈은 할머니뻘인 진옥과 경계를 넘는 연애 관계를 이루게 된다. 세대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두 사람의 멜로적 관계는 다른 한 편으론 역사현실에 상처입은 피해자들의 연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진옥은 스스로가 제주에 매여 떠날 수 없고, 또한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맨하탄’(1979)의 중년남성이 사랑하는 소녀의 미래를 염려해 떠나보내는 것과 똑같은 결정을 내린다. 아마도 경훈은 진옥과의 일을 추억으로 오래 간직할 것이다. 섣불리 해피엔딩으로 달려가지 않고 현실의 무게를 인정하는, 이처럼 성숙한 멜로는 요즘 보기 드물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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