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20여 년 전 아는 식당이 김장하는 날이어서 보쌈을 부탁했다고 점심시간 때 서울 남산 공원 안의 한 식당(지금은 사라진)으로 오라던 그였다. 당시 다섯 명 정도가 그 식당에 모여 김장 하는 아주머니 틈바구니에서 보쌈을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서민적이고 사람을 좋아했던 그가 지난 24일 안타깝게 지병으로 눈을 감은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공식적으로는 태흥영화사 이태원 전 대표이지만 그에게는 ‘사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이다.
 |
| 이태원 사장의 1950, 60년대 추억을 모티브로 제작한 ‘하류인생’ 촬영장에서의 기념사진. 왼쪽부터 이태원 사장, 임권택 감독, 김규리, 조승우, 이혜영, 정일성 촬영감독. 태흥영화사 제공 |
‘이태원 사장’하면 1980년대 한국 영화계의 대표 흥행작인 이장호 감독의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1985),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곽지균 감독의 ‘그후로도 오랫동안’ 등이 떠오른다. 그리고 임권택 감독을 세계 영화제에 알린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부터 ‘장군의 아들’(1990) 시리즈, ‘서편제’(1993), ‘태백산맥’(1994), ‘축제’(1996), ‘노는 계집 창’(1997), ‘춘향뎐’(2000), ‘취화선’(2002), ‘하류인생’(2004) 등 11편의 영화와 장선우 감독의 실험적인 영화 ‘경마장 가는 길’(1991), ‘화엄경’(1993), 그리고 아이돌 그룹 젝스키스가 출연해 화제를 모은 ‘세븐틴’(1998) 등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지난해부터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은 들었지만 비보를 들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와의 첫 만남은 1997년 여름이었다. 당시 신은경 주연의 ‘노는 계집 창’을 제작한다며 영화잡지 기자들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첫 만남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호탕함과 친화력이 대단해 금세 영화계 어른으로 따르게 됐다. 이후 ‘춘향뎐’ ‘세븐틴’ ‘취화선’ ‘하류인생’ 등 그가 제작하는 영화 현장을 취재하며 ‘영화인 이태원 사장’의 삶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이태원 사장은 창작자 마음을 잘 헤아려 준 제작자가 아닌가 싶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연출을 하는 감독의 역할과 제작비를 구해와야 하는 제작자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었다. 자신은 돈을 가져다 줄 테니 감독은 영화를 잘 만들라는 가장 단순하지만 경계를 지키기 힘든 제작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난 지금도 영화를 잘 모르겠다”던 그는 “제작자가 촬영을 간섭하면 영화가 망가진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촬영장이 궁금해도 자주 가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제작자였다. 이 사장은 ‘춘향뎐’이 한국 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을 때 아이처럼 기뻐했으며 꼭 칸영화제에서 수상해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이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이후 실제 ‘취화선’으로 임권택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했을 때는 평생소원을 이뤘다며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려 자랑스럽다”고 감격스러워했다. 이렇게 그는 한국 영화 최초 서울 관객 100만 돌파(‘서편제’)와 칸영화제 수상을 기록하며 영화 제작자로서의 돈과 명예를 다 성취했다.
1959년부터 영화를 시작해 끝까지 영화와 함께한 ‘충무로의 거목’ 이태원 사장이 평안히 영면하시길 기원한다. latehop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