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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중세시대 주체적 여성상을 만나다

‘라스트 듀얼’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1-11-17 19:28:44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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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듀얼’(2021)은 두 기사의 마상 창시합으로 막을 연다. 온몸을 갑옷으로 두르고 말 위에 오른 두 사람은 한 귀부인을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창을 겨눈 채 돌진한다. 얼핏 보면 이 결투는 기사도 문학의 한순간으로 보일 법하다. 음유시인의 노래로 전해지는 것처럼 사랑을 얻기 위해, 또는 긍지를 위해 목숨을 담보로 거는, 낭만주의적 기풍이 넘치는 이상화된 기사들의 모습. 그리고 152분에 달하는 영화의 나머지 분량은 이러한 중세사회의 도덕과 관습이 얼마나 허황되고 거짓된 것인가를 폭로하는데 오롯이 바쳐진다.
영화 ‘라스트 듀얼’ 스틸컷.
83세를 맞은 거장 리들리 스콧은 UCLA 영문과 교수 에릭 재거가 쓴 ‘마지막 결투 : 실제로 일어난 범죄와 스캔들과 결투 재판의 기록’을 손에 쥐고 자신의 장기인 시대극으로 다시 돌아온다.

백년전쟁 와중이던 14세기 프랑스에서 있었던 결투 재판(결투의 승패로 판결을 내리는 중세의 관습법)의 실화를 다룬다.

장 드 카루주(맷 데이먼)는 친구 자크 르 그리(아담 드라이버)와 함께 영주 피에르(벤 에플렉)의 휘하로 종군한다. 그러나 영주의 총애를 사 측근이 된 자크와 달리 눈 밖에 난 장은 푸대접받는 신세가 되고, 마르그리트(조디 코머)와의 결혼 지참금으로 얻을 땅의 일부,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영주의 지위 모두 피에르의 명령으로 자크에게 빼앗기고 만다. 파산 직전에 몰린 그는 재정 상황을 타개하고자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전해 기사 작위를 받지만, 집을 비운 사이 자크 르 그리가 아내 마르그리트를 겁탈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둘의 관계는 완전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숲속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두고 여러 당사자의 진술이 상이하게 모순되는 상황을 그린 ‘라쇼몽’(1950)처럼, ‘라스트 듀얼’은 동일한 사건을 두고 엇갈리는 세 사람의 상대적 관점을 번갈아 보여주는 구성을 취한다. 인간은 사건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마련이고, 장 드 카루주와 자크 르 그리의 진실은 각자의 입장에선 참일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 진실에 닿지 못하는 혼란함을 다룬 구로사와 아키라와는 달리, 리들리 스콧은 ‘마르그리트의 진실’이야말로 최종적 진실이라고 방점을 찍는다. 장 드 카루주는 아내의 안위보다 자신의 체면과 명예가 우선인 허영에 찬 가부장이며, 자크 르 그리는 로맨티스트를 가장한 위선자이자 주색잡기에 열심인 탕아에 지나지 않는다. 도입부에서 호기롭게 시작한 두 사람의 결투는 결말에 이르러서는 진흙탕의 개싸움처럼 연출되며, 감독의 데뷔작 ‘결투자들’(1977)에서처럼 수컷의 자존심이 얼마나 허망하고 덧없는 것인가를 실감케 한다.

마르그리트가 재판정에 서서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대목은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을 연상시킨다. 작은 꼬투리라도 붙잡아 잔 다르크를 마녀로 몰아세우려 했던 종교재판관들처럼, 성직자들은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을 일삼으며 그녀를 정숙하지 못한 여자로 몰아세우려 한다.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질문했던 ‘글래디에이터’(2000)처럼, ‘라스트 듀얼’은 중세에 내던져진 근대적 신여성의 이야기이다. 시대의 암우(暗愚)함 속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소신대로 행동하고 영지를 경영하는 마르그리트의 모습을 통해서, 리들리 스콧은 ‘에이리언’(1979) ‘델마와 루이스’(1991) 등 그 동안 일관되게 다루어왔던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상을 다시 한 번 관철해낸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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