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모는 이전에 35인의 감독이 참여한 칸 영화제 60주년 기념 옴니버스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2007)에서 단편 ‘영화 보는 날’을 맡아 연출한 바 있다. 중국 내륙의 어느 시골 마을에 필름 영사기가 들어오고,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뜬 마을 아이들은 축제 분위기를 만끽한다. ‘원 세컨드’(2020)는 이 3분짜리 단편의 아이디어를 기본적인 골격으로 삼아 확장한 영화 같다. 정체 모를 남자와 꾀죄죄한 몰골을 한 소녀는 사연과 이유를 숨긴 채 마을 회관에서 상영될 영화의 필름을 노린다. 우여곡절 끝에 분실되고 훼손된 필름은 겨우 회수돼 상영되면서 종국에 남자와 소녀는 서로 원하던 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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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원 세컨드’ 스틸 컷. |
필름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디지털 시네마가 대세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시점에서, 영화가 재현하는 과거 중국 시골의 풍경은 어렴풋이 그리움을 자아낸다. 길바닥에 질질 끌려 먼지를 뒤집어쓰고 망가진 필름을 세척하고자 온 마을 주민이 달려들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장관은 영화 관람이 일상다반사가 아닌 축제 날이자 특별한 공동체적 경험이었던 아날로그 필름 시절의 한 풍경을 정성을 들여 재현해낸다. 구시대의 유물로 사멸한 필름 영사기의 작동방식을 영사기사의 손길을 짚어가며 꼼꼼히 담아내는 분절된 컷들의 몽타주는 구닥다리 필름에 대한 아련한 향수이자 애틋한 사랑의 고백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시네마 천국’(1988)을 연상하게 하는 서정과 평화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엄혹하고 소름 끼치는 역사의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파시즘은 정치를 예술화시킨다. 반면 공산주의는 예술을 정치화한다’는 벤야민의 지적처럼 마을 주민이 단체 관람하는 영화 ‘영웅아녀’(1964)는 ‘항미 원조’라 칭하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미화한 냉전기의 국책 선전 영화이고, 주인공 남자가 집착하는 딸의 모습이 찍힌 필름 역시 정권을 홍보할 목적으로 배포된 뉴스릴이다. 집단주의로 억압된 시대의 프로파간다가 개인의 감정을 쏟을 유일한 창구라는 이 처절한 아이러니는 영화의 감정을 더욱더 깊은 역사의 질곡으로 끌어들인다.
남자의 정체는 노동개조소를 빠져나온 탈옥수다. 그의 죄목은 ‘조반유리(造反有理 : 모든 반항에는 이유가 있다)’를 구호로 내세운 홍위병의 파벌인 조반파의 대장과 싸웠다는 것이다. 촌 동네에는 여파가 밀어닥치지 않았지만, 바깥 세상에서는 아직 문화대혁명의 참극과 혼란이 휩쓸고 있다. 거지꼴로 돌아다니던 류가네 집 딸은 2년 후에는 알아보기 어려우리만치 단정한 차림을 하고 석방된 남자를 마주하는데, 이는 그 사이에 있었을 마오쩌둥의 죽음과 문화대혁명의 종식, 그리고 개방정책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이 결말에도 일말의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남자는 어째서 바로 딸을 만나지 않고 류가네 딸을 찾아가 사막에서 잃었던 한 조각의 필름을 구하려 한 것일까? 어쩌면 그의 딸은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서 이미 희생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은은하고 완곡하게 전달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선 선연한 심상으로 역사의 비극을 상기케 했던,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현실을 환기시켰던 ‘5일의 마중’(2014)의 교묘한 화술은 ‘원 세컨드’에서도 다시 발휘된다. 이 완곡함을 당장 생존을 위한 비겁한 타협이라 비판하는 건 쉬울 것이다. 하지만 예술작품은 살아남아 언젠가 시대를 증언함으로써 복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