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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아메리칸 드림 허상 까발린, 앵글과 프레임의 미학

앤서니 심 감독 ‘라이스보이 슬립스’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3-04-26 18:44:58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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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심의 ‘라이스보이 슬립스’(2022)는 캐나다에 정착한 한국인 모자(母子)가 겪어낸 시간의 발자취를 되짚는다.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라면 정이삭의 ‘미나리’(2020)를 떠올려 봄직 하지만, 이 영화의 결은 완전히 다르다. 바다 위로 떠오르는 아침해로 막을 올리며 영화는 어머니 소영이 거쳐 온 생애 전반기를 내레이션으로 압축한다. 버려진 채 발견된 고아는 꿋꿋하게 삶을 꾸리고 사랑을 찾았다. 그러나 남편은 자살하고 남겨진 그녀는 미혼모에게 아이의 출생신고조차 허락하지 않는, 사회적 약자에게 가혹한 조국을 떠난다.
동현의 첫 등교길 스틸.
1990년, 아들 동현의 첫 등교길. 신나게 달리는 아이의 발걸음은 철조망에 막히고 만다. 노력하기에 따라 성공하고 자유·평등을 누릴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은 인종과 문화 차이라는 현실의 벽을 마주하리라는 냉엄한 암시. ‘라이스보이’(Riceboy)라는 말 자체가 쌀을 주식으로 삼는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의 함의를 담고 있지 않던가. 16㎜ 필름의 흐릿한 해상력은 낡은 앨범을 펼쳐보는 것만 같은 정감으로 다가오지만 인종차별과 성추행 경험 등, 막상 그 안에 담긴 시간의 자국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일말의 낭만적 정취도 띠지 않는다.

유령처럼 공간을 배회하는 스테디캠 카메라의 롱테이크 이동촬영은 장면 상황에 맞춰 섬세하고 정교하게 구사된다. 마스터 숏과 클로즈업의 기능을 통합해버리는 이러한 방식은 설명 없이도 인물 간 관계의 양상과 감정의 흐름을 직감케 하는데, 소영이 애인 사이먼을 초대한 저녁이나 소영과 동현이 식탁에서 말다툼하는 아침, 카메라는 투 앤드 쓰리 샷에서 어느 한 쪽의 클로즈업으로 옮겨가 대화 상대방을 프레임에서 치워버림으로서 관계의 불편함 내지 소통의 단절을 표현한다.

좁디좁은 1.33:1 화면비와 가상의 창문틀을 설정해 인물을 가두는 도어 프레임, 옆얼굴이나 뒷모습을 포착하는 앵글과 프레임 인-아웃은 주변으로부터 차단되고 고립된 인물의 답답하고 먹먹한 심리를 대신 웅변한다.

1999년, 장성한 동현이 금발로 염색한 채 서클렌즈를 끼는 모습이 정면 클로즈업으로 부각된다. 탈아입구(脫亞入歐). 주류 사회에 동화하기 위해 본연의 모습과 습속을 버려야만 하는 아웃사이더의 처지. 과거 소영이 동현에게 읽어준 ‘토끼전’이 용궁마냥 낯선 타지에 떨어진 신세를 은유한다면 시한부 선고를 받고나서 사이먼에게 들려주는, 산에 버려질 어머니가 아들이 돌아갈 길을 잃지 않도록 예비한다는 고려장의 설화는 그녀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방황하는 아들에게 조국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려는 결심을 암시한다.

두 사람이 한국 땅을 밟는 시점부터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은 완전히 변모한다. 수평으로 펼치는 1.78:1 화면비, 온전히 땅에 딛고 선 듯 안정된 고정 카메라. 국외자 신세로 내몰려 변방을 떠돌던 이들은 마침내 고향을 회복한 것이다. 동현이 이발하고 목욕탕에서 서클렌즈를 잃어버리는 대목은 이전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라이스보이 슬립스’는 뿌리를 뽑혀버린 삶이 긴 반환점을 돌아서 돌아오는 회귀의 드라마이다. 논밭의 쌀로 표상되는 한국인의 정체성, 자신의 바탕을 되찾은 동현은 더는 헤매지 않고 앞길을 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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