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년간 재일조선인 삶 다룬 민족극단
- 김민수 대표 30여 명 협력팀 꾸리고
- 부산 각계 후원 힘입어 원정무대 성사
- 25~27일 북구서 ‘바람의 소리’ 선보여

- 재일동포 차별 등 껄끄러운 내용에도
- 일본 배우들 높은 완성도 무대 보여줘
- 나나세 씨 “소통·교류의 소중함 배워”
- 고3 히로키 군 “연기가 더 좋아졌어요”

초량에 있는 식당 ‘복순네’는 부산 중구 영주동 민주공원에서 공연한 예술가들이나 그 근처 공간에서 문화·인문 프로그램을 마친 사람들이 곧잘 찾는, ‘사랑받는’ 단골 뒤풀이 집이다. 지난 22일 저녁 귀한 손님들이 이 식당을 가득 채웠다. 일본 오사카에서 활동하는 재일동포 극단 달오름(대표 김민수)과 공연팀 환영식이었다. 이들은 지금은 경남 양산시에 사는 재일동포 작가 김창생이 쓴 장편소설 ‘바람 목소리’를 각색한 160분짜리 연극 ‘바람의 소리’(각색·연출 김민수) 부산 공연을 위해 배를 타고 온 길이었다.

지난 25~27일 부산 북구문화예술회관 무대에 오른 연극 ‘바람의 소리’(각색 연출 김민수) 한 장면. 일본 오사카의 ‘민족극단 달오름’ 작품이다. 주인공 설아(강하나 분)가 누워 제주도에서 가족과 살던 때를 떠올리는 장면이다. 아리아리 불꽃 제공

■8월 22일 환영식

복순네 식당이 내놓은 따뜻하고 푸짐한 한국 음식을 어느 정도 먹은 뒤 간단한 소개 행사가 끝나자, 취재를 시작했다. 작품에서 노년 시절 ‘동아’를 연기한 일본인 배우 아오조노 나나세 씨는 “나는 전업 배우는 아니다. 직업 생활을 하면서 연극도 한다. ‘바람의 소리’에 참여하며 소통·교류의 소중함을 많이 배웠다. 저 개인은 재일동포나 다른 이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작품에서 만난 세상과 경험은 또 다른 가르침을 주었다”고 했다.

재일동포 배우 최순기 씨는 직업이 변호사이다. “저는 일본에서 벤고시(변호사의 일본어)로 활동하는데, 이렇게 연극을 통해 민족의 마음을 알리고 타인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영화배우로도 활동하는 오오하시 잇키 씨는 “일본 야구선수 다르빗슈 유를 닮은 것 같다”는 말에 가볍게 웃음 지어 보였다. “외국에 처음 왔다. 여권도 이번 공연 때문에 만들었는데 이렇게 환대해 주시니 참 고맙다”고 했다. 재일동포 출신으로 극단 자갈치에서 활동하는 홍경지 씨의 통역 도움을 받아 가며, 인터뷰는 배우 부룡해, 변영나(달오름 부단장) 씨 등으로 이어졌다. 환영회의 밤이 깊어 갔다.

지난 27일 3회 차이자 마지막이었던 공연을 끝내고 ‘바람의 소리’ 출연진이 관객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극단 달오름과 연극 ‘바람의 소리’

민족극단 달오름은 일본 오사카를 기반으로 2005년부터 18년 동안 재일조선인의 뿌리와 삶을 다룬 작품을 꾸준히 공연해 왔다. 작품 23편을 만들었다. 대표 김민수 씨는 재일동포 3세로, 김창생 작가의 딸이다. 재일조선인은 재일동포·재일코리안 등의 용어와 뜻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한국이 해방됐을 때의 명칭은 여전히 ‘조선’이었는데, 이러한 뿌리를 간직하며 일본에서 차별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낸 한민족 디아스포라이다.

달오름은 한신교육투쟁을 다룬 마당극 ‘4·24의 바람’, 한때 일본에서 빈번했던 재일동포 여성 치마저고리 칼질 사건을 다룬 ‘치마저고리’, 일본 학교에서 재일동포 학생의 민족교육을 지켜주려 한 일본인 선생님을 다룬 ‘오조라 선생’ 등 재일동포의 시선과 삶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펼친다. 달오름 정식 단원은 현재 3명(김민수, 변영나, 니시오 카즈미)이다. 배우 20명을 포함해 스태프까지 30명이 필요한 연극 ‘바람의 소리’를 만들기 위해 김민수 대표는 온 힘을 다해 재일동포-일본 협력팀을 짰다.

연극의 원작이 된 김창생의 ‘바람 목소리’는 생기 넘치는 빼어난 작품이다. 1940년대 말 제주 4·3이 터지자 제주에 살던 어린 쌍둥이 자매 설아·동아는 밀항선을 타고 일본 오사카로 가게 된다. 부모가 두 아이만은 살리고자 최선을 다한 덕분이고, 오사카 이카이노에는 엄마 친구 시춘이 먼저 건너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아·동아가 오사카에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우애·환대를 느끼며 살아가고 살아낸다. 연극 ‘바람의 소리’는 지난해 일본에서 제1회 간사이연극대상 우수작품상을 받았다.

■8월 24일 연습 현장

공연장 로비에서 관객이 티셔츠 등 ‘바람의 소리’ 관련 굿즈를 살피고 있다.

부산 공연은 지난 25~27일 사흘 동안 북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다. 이 기간 출장이 잡힌 바람에 막상 공연을 볼 수가 없었다. 이번 기사는 ‘바람의 소리’ 작품 리뷰가 아니라 극단 달오름에 초점을 맞췄기에 취재는 계속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주위 공연 전문가들에게 관람 소감과 리뷰를 부탁하고, 대신 연습 현장이라도 참관하기로 했다. 지난 24일 연습 현장으로 찾아갔다. 주인공 설아 역을 맡은 재일동포 4세 배우 강하나 씨 모습이 먼저 보였다.

강하나 씨는 김민수 대표의 딸이자 김창생 작가의 외손녀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기를 배우고 한국 영화에도 출연한 배우다. 지난해 8월 강하나 씨가 부산 민주공원 소극장에서 보여준 1인극 ‘치마저고리’의 연기는 매우 인상 깊고 뛰어났다. 곧장 연습 장면에 빠져들었다. 아역 배우 두 사람이 나왔다. 어린 설아 역의 후지와라 미레이, 어린 동아 역의 후지하라 카논. 어두운 공간에서 곤경에 처한 두 아이의 대화는 이러했다. “후다리데 히토리!” 둘이서 하나라는 뜻이었다. 두 시간을 못 채우고, 연습 현장을 빠져나오며 이 대사를 곱씹었다.

■8월 27일 뒤풀이

열연하는 강하나(왼쪽) 조청향 배우.

오후 3시 시작한 3회차 마지막 공연이 끝난 지난 27일 밤. 복순네로 다시 향했다. 2박 3일 거칠고 먼 출장을 마치고 방금 부산으로 귀환한 터라 피곤했지만, 뒤풀이는 꼭 취재해야 했다. 밤 9시가 되자 극단 달오름 배우·스태프와 부산 쪽 공연 관계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상기된 얼굴이었다. 첫날과 둘째 날은 관객이 많지 않았는데 이날 마지막 공연은 만석에 가까웠고 호응도 높았다고 한다.

공연을 본 춤 예술인 하연화 씨는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 “배우 20명이 출연했다. 8세부터 75세까지였고, 8명은 재일동포 12명은 일본인이다. 재일동포 차별에 관한 내용도 있어 일본 배우가 연기하기 껄끄러웠을 듯한데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과 높은 완성도에 감동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술가이구나 싶었다. 강하나 배우가 막판에 추는 춤도 좋았다.” 원로 연극평론가 김문홍 선생은 페이스북에 이 작품의 에너지를 높이 평가하고, 배우 변영나의 연기에 주목한 리뷰를 올렸다.

뒤풀이에는 다른 지역에서 온 관객도 함께했다. 그중 서준식 씨도 있었다. 재일동포 출신으로 한국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그는 1970년대 재일동포 유학생 시국사건에 연루돼 고생한 뒤 한국에서 인권운동 등을 펼쳐왔다. 그는 최선을 다한 공연팀을 격려하고 자리를 떴다.

■만남·교류·협력의 힘

이 공연은 많은 사람의 협업을 통해 비로소 이뤄졌다. 다큐멘터리 ‘차별’ ‘항로’ 등을 만든 김지운 감독이 자신이 이끄는 단체의 창립 20주년 사업으로 기획했고, 극단 해풍 이상우 대표는 공연장소를 물색했으며,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모자란 비용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이외에도 부산 각계의 많은 사람이 후원에 나섰다. 무려 서른 명의 배우·스태프가 와야 하는 연극 공연은 그렇게 성사됐다.

뒤풀이 자리에서 배우 테라시마 히로키 군은 “저는 고3인데 이 공연을 계기로 연기를 더 하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자막을 맡은 강소원(김민수 씨의 딸이자 강하나 씨의 동생) 씨도 “배운 게 정말 많다. 앞으로 연극의 길을 걷고 싶다”고 했다. 배우 츠키노카 레이 씨는 이날이 생일이었다. 케이크가 등장했고, 복순네를 가득 메운 한국 사람·일본 사람이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문화와 교류는 힘이 셌다. ‘바람의 소리’ 대사가 떠올랐다. 후다리데 히토리. 둘이서 하나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