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을 출발해 남해고속도로를 따라 30분쯤 달려 경남 김해시 진례나들목에 도착했다. 요금소를 지나 고속도로에 내려서니 10층 남짓한 한두 동짜리 아파트와 길을 따라 늘어선 상가와 공장, 그 사이로 논과 밭이 이어지는 대도시 근교 풍경이 펼쳐졌다. 비슷한 풍경 속으로 5분쯤 달렸을까. ‘김해 도자의 거리’라는 글자가 적힌 도자기 병 모양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자동차 핸들을 꺾어 조형물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1㎞ 남짓. ‘○○도예’ ‘XX도예’ 간판이 붙은 상가 몇 개를 지나자 널찍한 공원과 그 가운데 들어선 생경한 모양을 한 건축물이 갑자기 나타났다. 초여름 뙤약볕 아래, 그 볕보다 강렬한 색색의 옷을 입은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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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이아크 김해 미술관 주전시관인 돔하우스. 돔하우스 외벽을 가득 메운 타일은 미술관 초대 관장을 지낸 신상호 도예가의 작품이다. |
클레이아크 김해 미술관(이하 클레이아크미술관)에 가보기로 마음먹은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김해에서 앤디 워홀, 뱅크시 등 팝아트 거장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고 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명성은 알지만 가본 적은 아직 없다’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서였다.
■도자도시의 명맥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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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이아크 김해 미술관 두 번째 전시관인 큐빅하우스 내부. |
낙동강 하구 비옥한 땅을 끼고 있는 경남 김해시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안정된 주거지이자 교역 중심지였다. 이를 발판 삼아 일찌감치 문화가 융성했고, 토기 제작 기술도 발달했다. 선사시대 패총에서 발굴해 낸 김해토기부터 시작해 금관가야 시기엔 가야토기 중심지가 된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분청사기를 궁중에 납품하는 기지 역할도 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 아리타 지방으로 끌려가 뛰어난 도자기 제작 기술을 전수한 이삼평과 여도공 백파선은 모두 김해 출신으로 추정된다.
‘도자 도시’ 김해의 위상은 1970년대부터 부산 경남 일대 도예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2006년 들어선 클레이아크미술관은 이 지역 정체성을 현대적 관점에서 잇는 또 다른 방식이자 그릇인 셈이다.
클레이아크미술관은 도자(클레이)에 건축(아크)을 얹어 버무린 건축도자 전문 미술관이다. 이 정체성은 미술관 건물에서부터 드러난다. 주 전시관인 돔하우스 건물의 벽면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있다. 언뜻 보면 페인팅 같지만 가까이 가면 약 50㎝ 크기 타일이다. 우리나라 전통을 잇는 색동과 원시 미술 색감을 융합한 이 타일은 초대 관장을 지낸 신상호 도예가의 작품이다. 건축물 자체가 1호 소장품인 셈이다.
미술관을 찾은 지난 18일엔 초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 미술관 안팎은 여유로웠다. 돔하우스를 지나 두 번째 전시관인 큐빅하우스로 이어지는 오르막길로 들어섰더니 오솔길 옆으로 여름의 푸르름을 입은 풀과 색색의 꽃, 그리고 소소한 작품이 조화롭게 들어서 있었다. 곳곳에 들어앉은 조각, 설치작품을 찾아내고 확인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미술관 전체 터는 약 4만2000㎡. 전시관인 돔하우스와 큐빅하우스 외에도 교육시설 등 모두 9개 건물이 있다. 도심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넓디넓은 부지에 여유롭게 들어선 미술관인 만큼 공간이 주는 개방감이 남달랐다.
■도자에서 팝아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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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팝아트 기획전시장에서 열린 공연 장면. 클레이아크 김해 미술관 제공 |
돔하우스와 큐빅하우스에서는 매일 전시가 펼쳐진다. 대다수는 미술관의 지향점이자 정체성인 도자 또는 건축과 맞닿아 있다. 한국·인도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연말 열린 인도현대도자전, 지난달 26일 열린 제9차 한·일·중 정상회의에서 주목받은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금바다, 아시아를 두드리다’ 등은 미술관의 성격을 명료하게 드러낸다.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 미술관을 찾은 건 도자가 아닌 팝아트를 보기 위해서였다. 올해 김해시는 전국체전 개최, 동아시아 문화도시 선정, 방문의 해 행사 등 3대 메가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에 발맞춰 미술관도 색다른 전시를 준비했고, 그 결과물이 팝아트다. “미술관 방문객을 연령별로 보면 20·30대가 가장 적다. 이들의 발길을 잡기 위한 전시”라는 최정은 관장의 설명처럼 진중함을 덜어낸 ‘힙한’ 전시다. 돔하우스 1층에서 오는 10월까지 열리는 기획전 ‘100%: this is who i am’에선 국내에서 활동하는 젊은 아티스트 4명(레지나킴, 핸즈인팩토리, 레드세다, 비주)의 회화·영상·피규어 작품을 볼 수 있다. 철조망이 액자가 되고 플라스틱 상자가 이젤 역할을 하는 등 공공 미술관이 으레 안기 쉬운 엄숙함을 덜어냈다.
2층에 펼친 ‘헬로우 팝아트’는 뱅크시, 앤디 워홀, 요셉 보이스, 하비에르 까예하(사진) 등 팝아트 대가 30여 명의 작품 150여 점을 망라한 전시다. 6개 섹션으로 나뉘어 연대순으로 전시된 작품을 보다 보면 수십 년 팝아트 역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시를 설명하던 최 관장은 불쑥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휴대전화에는 몇몇 중학생이 가수 지코의 ‘SPOT’의 춤과 노래를 커버한 영상이 재생됐는데, 놀랍게도 이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무대가 미술관 주 전시관인 돔하우스다. 이번 전시가 도자와 건축을 넘어선, 미술관의 새 도전임을 의미했다.
■도자 전문가 인큐베이터
전시와 함께 클레이아크미술관을 움직이는 다른 바퀴는 교육이다. 두 전시관과 별도로 자리 잡은 세라믹창작센터는 지금까지 도자 작업을 주로 하는 작가를 키워내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해 왔다. 개관 3년 차였던 2008년 작가 10명이 이곳을 찾은 것을 시작으로 올해 6월까지 모두 421명이 미술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거쳐 갔다.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에 시달리던 시기에도 한 해 20~30명 작가가 꾸준히 미술관을 찾아 기량을 갈고닦았다. 일반 학생을 대상으로 한 도자 체험과 유아·아동 맞춤형 체험 활동인 아트키친의 인기도 꾸준하다. 지난해에만 7000명이 도자 체험을, 6200명이 아트키친 프로그램을 경험했다.
미술관은 올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재)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최·주관하는 ‘공예창작지원센터’ 신규 대상지로 선정돼 조직 개편부터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까지 분주하다. 특히 디지털 공예 메이커 스페이스와 관련 장비를 구축해 지역 공예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다. 다만 전문가 양성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면서 일반 학생 대상 체험 활동 폭이 줄어든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 미술관 둘러보니 도자기 사고싶네…지역 작가들이 만든 작품 한 자리에
- 김해분청도자 전시판매관서 구입 가능
- ‘도자 도시’ 역사 담긴 박물관도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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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이아크 김해 미술관 바로 옆에 자리한 김해분청도자 전시판매관 내부. |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이 현대 도자에 방점을 찍은 곳이라면, 미술관 바로 옆에 자리한 김해분청도자박물관은 도자 도시로서 김해의 역사에 좀 더 집중한 공간이다.
2009년 김해분청도자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연 이곳은 2019년 명칭 변경, 2022년 시설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 모습이 됐다. 연면적 1357㎡에 2층으로 구성된 전시관에서는 ▷분청사기 변천사 ▷김해 일대 주요 가마터 소개 ▷주요 가마터 출토 토기 전시를 만날 수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해마다 3~4회 기획전시가 펼쳐지는데, 김해 지역에서 활동하는 도자 작가들의 작품이 다채롭게 선보인다. 외부에는 전통가마를 복원한 가마터도 있다.
박물관과 미술관 사이에 2층짜리 건물이 하나 더 있는데, 2022년 11월 문을 연 김해분청도자전시판매관이다. 300㎡ 넘는 1층 판매관에는 김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70여 명 제작자가 만들어낸 상품이 빼곡하게 전시돼 있다. 접시·사발 같은 생활 식기부터 항아리, 꽃병, 토우 등 종류가 워낙 다양해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에 이렇다 할 기념품 가게가 없어 아쉬운 마음을 이곳에서 달랠 수 있다. 판매관은 ㈔김해도예협회가 김해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곳으로 도자 판매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체험프로그램, 지역 도예가를 위한 맞춤형 연구 등의 기능도 수행한다. 장은애 관장은 “차 사발전 같이 콘셉트를 잡은 전시도 열고 커피 핸드드립 체험, 말차 체험 수업도 진행하는 등 방문객을 늘리기 위해 여러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