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송미술관 개관으로 역사여행지 부상
-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서 출발
- 민족운동의 중심 조양회관도 둘러봐야
- 청라언덕 만세운동 펼쳐진 3·1운동길
- 이상화·서상돈 고택과 교남YMCA회관
- 발길 닿는 근대건물마다 역사 깃들어져
올해 국내 문화예술계 대형 뉴스를 꼽으라면 ‘대구 간송미술관’ 개관이 빠질 수 없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국외 유출을 우려해 사비를 털어 각종 미술품을 입수, 보존해 온 인물인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을 기리는 공간이 대구에도 들어섰다. ‘문화재 지킴이’ 전 선생은 1938년 서울 성북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세워 ‘훈민정음해례본’(국보 제70호), 신윤복의 ‘미인도’(보물 1973호) 등 국외 유출 위기의 작품을 수집, 보관·전시해 왔다. 그 분원이 지난 9월 대구에 개관한 것이다. 규모로 보면 대구 미술관이 사실상의 본원 기능을 한다. 지난 1일까지 석 달간 개관전을 열었는데 관람객이 20만 명 넘게 다녀갈 정도로 그야말로 대성황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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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길’이 시작되는 대구 청라언덕 입구. 3·8 대구만세운동 벽화가 그려져 당시의 생생한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
개관 직후인 9월 찾았던 대구 간송미술관에서, 분원 장소로 왜 대구가 선택됐는지 궁금해졌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지키려 한 전 선생의 정신이 구한말~일제 시기 국채보상운동 등 항일운동을 주도한 대구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는 게 미술관 측의 설명이었다. 대구지역에서는 어떤 항일운동이 전개됐던 걸까. 그 흔적을 좇아 지난달 24일 다시 대구를 방문, ‘항일투어’에 나섰다.
■‘항일로드’ 출발점은 기념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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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효목동에 설치된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 탑 높이가 무려 45m에 이른다. |
대구 ‘항일로드’는 효목동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에서 출발했다.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이 지역 독립운동가의 항일 활동을 기리고 기억하고자 6690㎡ 부지에 시민 모금을 통해 2006년 건립됐다. 어마어마한 탑 높이에 압도되는데 무려 45m다. 광복을 맞은 해인 1945년을 의미한다. 탑 방향은 일본을 향했는데, 이는 엄중한 대일(對日) 경고를 뜻한다고 한다. 탑 뒤 명각대에는 1800여 명의 독립유공 국가서훈자 이름이 새겨졌다. 탑 좌우로는 조형물이 설치됐는데 무장투쟁 만세운동 학생운동 등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항일에 나섰던 이들을 기념한다.
탑 뒤쪽으로 가면 근대건물이 나오는데 ‘조양회관’이다. 1922년 완공된 이 건물은 동암 서상일(1887~1962) 선생을 위시한 민족 지도자가 3·1운동 이후 일제에 맞서 민중을 계몽하고 민족사상을 고취하고자 건립한 교육회관이다. 이곳에서는 일제강점기 집회 문화행사가 함께 열려 영남 일대 민족운동의 중심이 됐다. ‘아침 해가 비치는 곳’이란 뜻의 조양(朝陽)처럼 다시 찾을 조국에서 해 뜰 날을 맞겠다는 염원과 각오가 담겼다. 달성공원에서 현재 위치로 이전해 지금은 광복회 대구지부가 사용, 역사적 뜻을 잇는다.
■원도심 곳곳 근대로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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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계단으로 이뤄진 3·1만세운동길. 이곳을 넘어 서문시장에 집결한 거대한 만세 행렬은 당시 대구경찰서를 지나 달성군청으로 향하면서 역사적인 3·8 대구만세운동을 일으켰다. |
대구지역 항일운동 역사를 되짚어볼 만한 장소는 대구 중구 ‘근대로(路)의 여행’ 골목투어 2코스에 몰려 걸으면서 찬찬히 둘러보기 좋다. 조선 말기 들어온 선교사의 집과 1899년 문을 연 대구 경북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이 있는 청라언덕에서 출발한다. 동산병원 언덕인 이 일대는 ‘3·1운동길’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3·1 조선독립만세운동은 시차를 두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는데, 대구에서는 일주일 늦은 3월 8일 만세운동이 펼쳐졌다.(부산은 그보다 닷새 뒤인 3월 13일 동래에서 처음 시작됐다)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등 학생들이 경찰 감시를 피해 이곳을 통해 이동했는데, 3·8 대구 만세운동의 ‘비밀통로’로 활용된 셈이다.
당시 주도자들이 비밀회합을 하며 만세운동의 의지를 다진 남성정예배당(현 대구제일교회)을 지나면 90계단으로 이뤄진 3·1만세운동길이 나온다. 이곳을 넘어 서문시장에 집결한 만세 행렬은 대구경찰서(현 대구 중부서)와 동성로를 거쳐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인근)으로까지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역사적인 3·8 대구 만세운동을 성사시킨다.
1902년 완공된 대구 최초 서양식 건물인 계산성당을 지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1850~1913) 선생의 고택에 이른다. 대한제국 말기 경제적 예속을 노린 일제의 강제차관으로 대한제국이 1300만 원(현재 3300억 원) 거액의 빚을 지게 되자, 대구 거부였던 서 선생은 ‘국채를 갚아 나라를 구하자’며 1907년 김광제(1866~1920) 선생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제안했다.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고종 황제까지 참여하면서 순식간에 국내를 넘어 해외로까지 확산됐다. 모은 돈을 서울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도적떼를 만났는데 국채보상 모금액이라고 전하자 돈을 갈취하기는커녕 이들도 돈을 보탰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의 방해로 끝내 무산됐지만 우리 역사에서 민중의 자발적 주권수호운동의 대표 사례로 기억된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나랏빚을 갚겠다고 일어난 ‘금모으기 운동’이 ‘20세기 국채보상운동’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이 참여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운동으로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 가치가 더 빛난다. 서상돈 고택에서는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모으는’ 저금통 만들기를 할 수 있어 가족 단위 여행객의 체험이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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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서상돈 선생의 고택. |
바로 옆에는 이상화(1901~1943) 선생의 고택이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의 집이다. 시비에 새겨진 그의 시를 읽으며 당시의 절망을 회상해 본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란 허무함 속에서도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에서 숭고한 결기를 다시 한번 느낀다.
고택을 나와 약령시장 쪽으로 가다 보면 항일거점인 옛 ‘교남YMCA회관’이 나온다. 3·1만세운동 지도자의 회합 공간으로, 물산장려운동 신간회 등 3·1운동 이후 주요 항일민족운동의 대구 경북지역 본산지 역할을 한 곳이다. 만세삼창으로 대구 3·8 독립만세운동을 이끈 교남YMCA 초대 이사장이자 남성정교회 담임목사, 계성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이만집(1876~1944) 선생,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김태련(1879~1943) 교남YMCA 초대 사무총장 등 당시 항일운동가의 면면을 전시물로 만난다. 이곳 박병종 해설사는 “항일운동가의 회합은 물론 미술전시회, 홍난파 선생의 연주회 같은 음악회 등도 펼쳐져 당시 대구시민의 주요 문화공간으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건축물 자체도 볼 만하다. 1914년 건립된 2층으로 된 붉은색 벽돌 건물로, 2층 강당에 오르면 목조 천장이 드러나는데, 한옥과는 다른 양식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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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년 건립된 교육회관으로 영남 일대 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된 대구 효목동 ‘조양회관’. |
■국채보상운동공원 찍고 독도커피로 마무리
국채보상운동 발상지라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잇고자 대구는 도심공원인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조성했다. ‘동인공원’이라고 불리던 이곳은 1999년 현재 명칭으로 변경됐다. 원래 10월 8일이던 대구시민의날도 2020년부터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2월 21일로 바꾸어 기념한다.
공원 입구에 있는 달구벌 대종을 감상한 뒤 오른쪽으로 향하면 여성기념비가 있다. 국채보상운동 당시 주로 남성은 담배를 끊고 여성은 여학생부터 주부 기생까지 패물을 모아 돈을 마련했는데, 당시 운동에서 여성의 기여도가 상당했음을 알리고 기념하려는 취지의 설치물이다. 그 옆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서상돈 김광제 선생의 흉상이 놓였다. 시민공원 안에는 ‘국채보상운동도서관’도 있다. 1919년 개관해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공공도서관으로, 이곳 역시 ‘국채보상운동’을 이름 전면에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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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커피로스터스의 ‘독도 블렌딩’. 대구 항일투어의 마무리로 좋은 커피다. |
이번 대구지역 항일투어는 ‘독도커피’로 마무리했다. ‘커피도시 부산’만큼이나 대구도 독특한 카페가 많아 최근 전국에서 여행객이 몰리는데, 그중 요즘 류커피로스터스가 입소문을 타면서 인기몰이 중이다. ‘독도 블렌딩’이 대표 메뉴다. 꽃향과 과일향이 조화를 이루며 강하지 않은 산미를 내는 커피로, 브루잉으로 즐길 수 있다. 커피를 주문하면 독도가 그려진 안내카드를 주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영토 독도처럼 이 카페를 대표하는 상품이라는 의미에서 명명했다는 설명이다. 커피 자체는 한일 역사와 관계가 없지만, 이름이 그래서인지 항일투어를 마무리하며 들이키기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