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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납품할 콘텐츠’로 전락한 한국영화의 현실을 보다

‘파과’

  • 조재휘 영화평론가
  •  |   입력 : 2025-05-21 18:35:44
  •  |   본지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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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2025)는 2인 1조의 호흡이 맞지 않아 발걸음이 뒤엉키다 넘어지는 불협화음의 영화이다. 구병모 소설 ‘파과’의 초점은 점점 스스로가 망가져 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 존재의 상실감과 외로움, 그리고 이제까지 둘러보지 않았던 주변의 낡은 것들, 같이 마모되고 풍화돼 가는 것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돌아보게 되는 내면의 변화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은퇴할 시점이 다가오는 노령의 여성 킬러라는 주인공의 설정은 장르영화를 필요로 하는 시장의 입맛에 맞게 각색할 구실이 충분해 보였을 것이다.
영화 ‘파과’의 한 장면.
결국 이건 방향성의 문제이다. 원작의 제목만 따왔을 뿐 실상은 판에 찍은 듯 양산되는 근래 한국형 액션 누아르의 목록에 부질없는 한 편을 더 보탤 것인지, 아니면 문학 텍스트에 대한 감독 나름의 해석을 담아낼 것인지. 민규동 감독의 고심은 동시에 성립하기 어려운 두 개의 분열적인 각색을 양립시켜야 한다는 데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자를 만족시키고자 한 의무감에서 비롯된 결과는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난맥상으로 귀결되고 만다.

소설 한 권 분량의 이야기를 옮겨 담기에 영화 한 편이라는 상자의 용량은 넉넉지 않다. 때문에 각색의 과정에서 많은 플롯을 쳐내 가며 극의 초점을 잡기 마련인데, 그러한 가지치기의 과정, 선택과 집중에서 영화만의 독립된 해석이 삐져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받은 인상은 창작의 중심에 서서 전체를 조율해야 할 감독의 존재와 의도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러닝타임 내에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촉박함 때문인지 ‘파과’는 편의적인 전개 일변도로 흘러간다. 원작의 주제는 생활의 실감이 없는 작위적인 대사 몇 줄로 던져지고, 자연스러운 서사와 감정의 축적 없이 산발적으로 널뛰기를 거듭하니, 배우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극의 설득력은 실종되고 만다. 젊은 시절의 조각(신시아)과 노인이 된 현재 시점의 조각(이혜영)을 번갈아 가는 교차 편집 또한 각기 다른 시간대의 이야기를 하나의 감정선으로 이어줄 연결고리가 빈약하니 과시적인 기교에 그치고 만다.

베테랑 킬러이지만 전성기처럼 몸을 놀릴 수 없는 주인공의 입장을 고려했다면, 조각의 액션은 큰 동작 없이도 간결하고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공격을 맞더라도 가급적 치명상은 피하는 식으로 쇠약해짐 속의 노련함이 표현되어야 했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폭행을 노인이 거뜬히 견디는 데서 핍진성은 심각하게 손상되고, 동작과 합의 시인성도 떨어져 액션이 벌어지고 있음은 알 수 있지만 정작 액션의 쾌감은 없다.

묻고 싶다. 이제 한국영화계에서 영화는 더 이상 납기에 맞춰 납품할 공산품에 지나지 않는 ‘콘텐츠’인지, 아니면 상업적 성공의 압박과 긴장에 처해있으면서도 한 땀 한 땀 의욕으로 일구어나가는 ‘작품’일 수 있는지. 안타깝게도 ‘파과’의 의의는 감독 경력의 발전선상에서가 아니라 쇠락해 가는 한국영화 현실의 증거라는 데 있어 보인다. 장르영화에서도 개인적 비전을 관철시키는 ‘대중적 작가’와 세공력 있는 ‘웰메이드’의 실종을, 우리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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