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디어’(2017)는 무너져가는 가부장제의 모순을 정면에서 지르고 들어간 현대의 그리스 비극이었고,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 또한 사인화(私人化)한 권력의 비합리적인 속성을 풍자한 주의 깊은 관찰과 능동적 해석을 요구하는 지적인 설계의 우화였다. 그리고 이 두 편의 걸작으로 정점에 도달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경력은 꾸준히 하강 곡선을 그리는 중이다. ‘가여운 것들’(2023)에서 극한에 달한 인공적 미장센의 탐미주의적 매혹은 굉장한 전시적 효과를 일으키지만, 정작 영화의 서사는 여성 주인공의 행적을 단순히 나열하는 데 그쳤다. 과포화된 미적 정보에 반비례하듯 내적인 의미 정보는 빈곤해지는 이 문제는 ‘카인드 오브 카인드니스’(2024)에 이어 ‘부고니아’(2025)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한국 영화 르네상스기의 저주받은 명작,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2003)를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세부적인 설정의 변경은 있으나 대체로 원작의 얼개를 충실히 따라간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유제화학 사장 강만식은 왕자, ‘부고니아’의 제약회사 CEO 미셸(엠마 스톤)은 황제이고 성별이 바뀌었으며, 물파스 고문은 항히스타민제 크림으로 대체되고, 원작의 결말에선 지구라는 행성 자체가 파괴된다면 리메이크에서는 인류만 멸종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병구와 마찬가지로 테디(제시 플레먼스)는 외계인에 의한 음모론에 심취해 기업의 CEO를 납치하고 고문하는 범행을 저지른다. 그의 의심대로 CEO는 외계인의 우두머리였고, 인류의 폭력성에 실망한 외계인의 결정으로 지구상의 인류는 가축이 살처분당하듯 멸망하고 만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지구를 지켜라’는 매혹적인 리메이크 대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장준환은 평범한 일반인의 시선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상식 외의 존재, 질서 바깥에 놓여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사는 외계인을 자본가의 은유로 보고 동일시했다. 불합리한 사회 시스템이 초래한 가난과 고통을 감내하며 분노에 휩싸인 하층민 노동자와 그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성공을 누리고 있음에도 일말의 책임감도 죄의식도 없으며, 그들의 분노를 남 탓만 하는 비겁함으로 몰아가는 상류층 자본가의 몰상식함. 양자 간의 소통 불가능과 대립을 그리는 이 계급론적 이분법의 우화는 양극화가 완화되기는커녕 갈수록 더 심화해 가는 전 세계적 추세 속에서 여전히 유효한 동시대적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이다.
‘부고니아’(소를 때려죽인 후 사체를 작은 공간에 집어넣어 방치하면 꿀벌이 생겨난다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의 풍속 ‘부고니아’에서 따온 것)의 문제점은 플롯과 모티브는 가져왔지만, 주제에 걸맞은 설득력이 실리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지구를 지켜라’에선 피해자로서 병구가 과거에 겪은 비극이 회상으로 제시되면서 그의 공격성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원인과 맥락을 분명히 한 바 있다. 반면 ‘부고니아’에서 란티모스는 이러한 드라마를 대거 생략해 버렸고, 때문에 테디의 분노는 정당성을 잃은 채 단지 포즈로서만 남는다. 이건 표면의 양상만 그리면 저절로 깊이감이 만들어질 것이라 믿는 착각의 산물이며, 사회적 담론은 빈껍데기인 작품을 치장하는 패션으로 억울하게 끌려 나올 뿐이다. ‘왜?’와 ‘어째서?’가 빠져버린 채 도식의 껍데기와 장광설만 남은 작품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부고니아’는 증명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