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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약한 왕’ 단종? 역사의 편견 뒤집은 상상력

영화 ‘왕과 사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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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항준 연출, 박지훈 단종 열연
- 폐위된 임금의 감정 변화 초점
- ‘유지태표 한명회’도 관람 포인트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단종을 연기한 배우 박지훈. 쇼박스 제공
계유정난. 1453년(단종 1년) 음력 10월,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하고자, 친조카인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황보인 등을 제거한 사건.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학창 시절 국사책에서 접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역사가 스포일러이긴 하지만, 워낙 극적인 사건이었던만큼 계유정난은 대중매체에서 직간접으로 꾸준히 다뤄져 왔다. 1990년대 방영된 드라마 ‘한명회’와 ‘왕과 비’, 2011년 ‘공주의 남자’, 그리고 세조를 연기한 이정재의 레전드 등장 신으로 지금도 회자되는 영화 ‘관상’(2013)이 대표적이다.

같은 역사 사건을 배경으로 할지라도 ‘누구’를 취사선택해 ‘어떻게’ 포커스를 맞추느냐에 따라 극 분위기는 늘 달랐다. 가령, 이덕화에게 KBS 연기대상을 안긴 ‘한명회’는 제목이 알려주듯 수양대군의 책사였던 한명회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였다. ‘공주의 남자’는 계유정난 뒤 원수가 되어버린 김종서의 아들 김승유(박시후)와 수양대군의 딸 세령(문채원) 간의 운명적인 사랑을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그려내는 차별화로 인기를 얻은 바 있다.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2007년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 최초 남북 합작 드라마가 만들어진 바 있는데, 그 드라마가 단종을 향한 사육신의 충절과 기개를 바탕으로 한 ‘사육신‘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렇듯 어린 조카를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권력을 잡은 삼촌 세조와 그런 세조를 도와 쿠데타를 성공시키며 권력자 반열까지 오른 한명회, 그리고 단종 복위를 위해 뜻을 굽히지 않았던 사육신 등의 캐릭터가 워낙 강렬해서일까. 애석하게도 계유정난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단종은 숱한 콘텐츠에서 이야기의 배경 혹은 병풍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고래들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나약한 왕으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어린 군주로.

장항준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유해진(오른쪽)과 박지훈이 주연을 맡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한 장면. 쇼박스 제공
이는 역사가 승자의 기록인 이유도 크다. 승자의 언어로 쓰인 기록에서 진실은 물음표를 품기 마련. 실제로 ‘세조실록’은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다고 몇 줄에 짧게 기록함으로써 어린 왕의 이미지를 더욱 나약하게 만들었다. 반면 훗날 ‘병자록’은 단종의 사망 원인을 자살이 아닌, 사약으로 적고 있다(단종의 정확한 사망 원인은 지금도 미스터리다).

아마도, 대중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박혀 있는 미디어 속 단종의 모습은 ‘한명회’와 ‘왕과 비’에서 정태우가 연기한 단종일 것이다. 권력을 등에 업고 점점 치고 올라오는 수양대군을 찾아가 자신을 용서해 달라며 눈물을 쏟는 정태우의 연기가 숱한 ‘안방’을 눈물로 적셨는데, 훗날 정태우는 한 예능에 출연해 “조선의 왕 중 단종이 제일 싫다”고 농담 섞인 말과 함께 “(‘왕과 나’에서) 연산군을 연기하면서 해소가 많이 됐다”고 고백한 바 있다. 나약한 왕으로 해석된 왕을 어린 나이에 연기하며 느꼈을 외로움을 드러낸 말이었다.

장항준 감독이 연출하고 박지훈이 단종을 연기한 ‘왕과 사는 남자’(4일 개봉)는 숱한 미디어에서 조연으로 머물던 단종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라는 점에서 각별하다. ‘유약한 왕’이라는 박제된 이미지를 지우고 주체적인 모습의 단종을 그려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왕위 찬탈극이 이미 끝난 시점에 시작하는 영화는 단종이 유배지에서 민초들과 마음을 나누며 강인한 범의 눈빛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117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단종의 심리 변화를 입체로 표현해 낸 박지훈의 연기가 시쳇말로 ‘압살 수준’이다. 영화를 만든 장항준 감독은 이에 대해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우리가 아는 단종의 나약한 이미지는 다 후대에 만들어진 거예요. 어리고, 왕이 됐다가 쫓겨나고, 비극적으로 죽었으니까 나약하고 줏대 없었을 거로 생각하는데, 그건 그 인물의 성격이 아니라 당시 정치적 상황일 뿐이죠.”

‘왕과 사는 남자’가 인물을 다룬 방식에서 흥미로운 또 하나는, 세조를 과감하게 생략한 전략이다. 모르긴 해도 ‘관상’에서 이정재가 남긴 이미지가 워낙 강렬하게 남은 이유도 있지 않나 싶은데, 대신 영화는 세조가 했을 법한 롤을 유지태가 연기한 한명회에게 몰아줬다.

앞서 얘기했듯, 같은 역사 사건이라도 ‘누구’를 ‘어떻게’ 포커스에 맞추냐에 따라 뉘앙스는 다른 법. ‘유지태표 한명회’를 기존 한명회를 연기한 배우들과 비교해 보는 것도 이 영화를 즐기는 또 하나의 포인트가 되어줄 것이다.

정시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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