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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디세이’의 한 장면. |
크리스토퍼 놀란이 차기작의 행선지로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선택한 것은 놀랍지 않다. 거대한 역사나 여정 속에 놓인 한 인간을 자주 묘사하기도 했고 비선형적 서술, 극을 주도하는 과거 회상, 시점의 다변화 등 오디세이아의 특징들이 그동안 놀란이 구사해온 서술 구조와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오디세이아는 전쟁 영웅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 이후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영웅담이다. 이 작품이 지목하는 바는 분명하다. 오디세우스는 귀환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묻는다. ‘누가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를 알아볼 것인가’. 그것은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이 가지는 책임을 짊어짐과 동시에 이 여정이 오디세우스로 인정받기 위한 한 남자의 모험담임을 말한다.
하지만 놀란은 오디세이아의 뼈대는 유지하면서도,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영화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맷 데이먼)는 신화의 풍경을 마주하고 그 가운데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어딘지 묻는다. ‘신화시대가 가장 중요시했던 가치, 명예와 영광을 위해 파괴되었던 것들이 무엇인가’. ‘또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영화의 마지막 오디세우스가 내뱉는 문명과 전승에 관한 자조적 대사는 ‘전쟁 영웅의 무용담’이라는 텍스트 이면에 잠겨있는, 문명의 폭력성과 그에 따른 인간으로서의 죄의식을 직면하게 만든다.
문제는 놀란이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영화가 추구하는 목적과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의 불일치다. ‘오디세이’는 전 장면을 IMAX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고, CG를 최소화했다는 점을 작품의 성취라고 광고해 왔다. 디지털이 아닌 실물 필름을 고집했다는 사실과 CG 없이 영화의 장대한 스펙터클을 현실로 직접 펼쳐냈다는 점에서 놀란 특유의 야심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는 ‘오디세이’가 목표하는 인물의 내면을 그려내는 것과는 상관없이 기능하고 있다.
이전 작품도 그랬듯, 놀란은 인물의 심리나 감정의 서사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작품 속 극을 이끄는 동력과 핵심 정서인 죄의식, 이로 인한 귀환의 딜레마, 그리고 이타카의 위기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모두 ‘시간’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그런데 정작 영화에서 시간은 10년, 20년, 7년과 같이 대사로만 호명될 뿐 관객이 그 시각을 감각하게 만드는 어떤 요소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인물의 분장마저도 그렇다. 시간이 느껴지지 않으니, 오디세우스의 여정은 10분에서 30분 사이의 단편적인 에피소드처럼 느껴진다. 이는 ‘오디세이아’의 서술 방식과 일치할지는 몰라도, 감정의 흐름을 단편적으로 만들면서 인간 오디세우스와는 멀어지게 만든다. 놀란이 의도하는 거대한 가치 앞에 복속하는 인간 오디세우스만 남는 것이다.
어쩌면 이 역설적인 태도야말로 신화의 현대적 풍경인지도 모르겠다. 인간 개인이 사라진 자리에서, 놀란의 자의식은 스스로를 신화의 주인공으로 세운다.
그런 의미에서 ‘오디세이’는 놀란 특유의 세계관으로 ‘다시 찍은 신화’다. 당연하게도 거기에는 신화가 아니라, 신화를 찍었다는 이력만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