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노톨로지(agnotology)라는 미디어 용어가 있다. 값싼 뉴스는 넘쳐나지만 진짜 정보가 없는 상황을 이르는 말이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로버트 프록토 교수가 특히 논쟁적인 주제에서 뭔가 뉴스는 많은데 정보가 없는 상황을 이렇게 정의했다지만 시민들 입장에서 의료계를 이보다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도 없겠다 싶다.
우리는 의료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산다. 인터넷을 두드리면 각종 의료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막상 병원에 갈 일이 생기면 그많은 정보를 제쳐두고 아는 의사부터 먼저 찾는다. 내 몸을 맡기려면 제대로 진료할 수 있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에 더해 적어도 병원에 간다면 다른 사람들과 뭔가 다른 대접을 받고 싶은 욕심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방도가 마땅찮다. 부탁을 받아야 하는 의사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이런 상황에서 VIP신드롬이 발생한다.
'가벼운 치질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던 A 씨. 막상 수술실에서 확인된 A 씨의 치질은 뿌리가 깊었다. 병원은 VIP 대접을 하느라고 치질의 뿌리까지 제거하는 큰 수술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마침 회사에서 격무에 시달리던 A 씨는 예상치 못한 후유증에 할 말을 잃었다'.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수술실, B 씨의 수술을 병원 원장이 직접 집도했다. 예상보다 출혈량이 많았던 B 씨. 원장이 수혈 준비를 외쳤지만 아뿔싸, 수혈에 필요한 혈액 부족. 이날 팔을 걷고 나선 병원 직원들은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VIP신드롬 사례는 의료계에 차고 넘친다. 의사들이 아는 사람으로부터 특별한 부탁을 받아 진료 및 수술에 나섰으나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을 VIP신드롬이라고 한다. 환자에게 잘 대해 주려다 보니 부담이 생겨 오히려 수술이나 진료에서 역효과를 내는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의료계가 과연 기본에 충실한가라는 질문이다. 왜 의사가 신경을 쓸수록 예기치 못한 일이 더 잘 생기는 것일까. VIP 대접을 받았다고 여겼던 환자들이 이 사실을 알면 기분이 어떨까. 만약 의사가 자신의 가족을 환자로 진료한다면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
하버드대학교 의대 연구(1984년)에 따르면 부작용이 생긴 의무기록 1133건을 검토한 결과 70%는 예방이 가능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연구 결과는 최근 우리나라 의료기관들이 글로벌 스탠더드의 전형으로 여기는 JCI(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 인증 규정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323개 기준, 1192개 항목을 평가하는 방대한 JCI 인증의 첫 번째 요구사항이 환자 확인이다. 안타깝게도 수술실에서 환자가 바뀌고 환자의 오른쪽 다리 대신 멀쩡한 왼쪽 다리에 메스를 대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 의료계의 현실이다. 이를 두고 의료사고를 설명하는 스위스 치즈 모델을 제시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병원에서 하나의 결함이 아니라 시스템 결함으로, 구멍이 뚫린 스위스 치즈를 하나의 끈으로 연결하듯, 사고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오는 11월 경부고속철도 완전 개통을 앞두고 부산 의료계에서 환자들의 역외 유출을 막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한 해 4000억 원 이상이 역외 환자 유출로 인해 수도권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며 부산 환자 지키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서울로 갈 환자들이 이런 상황을 납득하고 서울행을 포기하겠는가.
부산 환자 역외 유출을 막으려면 부산 의료계의 환골탈태가 우선이다. 굳이 JCI 인증 첫 번째 항목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환자를 VIP로 대우하려는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의료계는 과공비례라며 VIP신드롬을 웃어넘기지만 환자 입장에서라면 아무리 과하더라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의료 서비스의 질이고 양이다. 30분 기다렸다가 고작 30초 만에 진료를 끝내도 뭐라고 하소연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는 것이 우리의 환자들이다. 적어도 환자 입장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