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학에서 '성장'은 양적인 것, '발전'은 질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이를테면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이룬 것은 경제 성장이지 발전은 아니다"라는 식의 표현이 그것이다. 물론, 성장이 발전의 주된 부분과 기초를 이룬다는 점에서 둘을 확연히 구분할 수 없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요즘은 발전이라는 개념도 그다지 좋게만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발전이 과연 좋기만 한 것인가"라는 질문은 이미 고전적인 문제제기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발전의 척도가 되어온 GNP 혹은 GDP에 대한 비판이 환경에 대한 관심 증대와 더불어 발전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을 키웠다.
돌이켜 보면 한국은 단시간에 참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서구나 일본을 여행한 많은 사람들이 한국인이라고 밝히기를 멈칫거리던 것이 엊그제인데, 이제는 누구도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꽤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그만큼 실질적인 발전을 이룬 것이다. 욕심이 많기는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향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국민성, 어떤 분야든 극성스레 달려들어서 마침내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탁월한 재능, 자신은 덜 먹고 덜 입어도 자식만큼은 훌륭히 기르고자 하는 부모들의 향학열과 희생정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나라와 지역에 퍼져 사는 도전정신, 이런 것들이 일제식민과 전쟁, 독재의 어려움을 헤치고 마침내 나라의 발전을 이룬 것이다.
그런 우리 한국이 새롭게 진일보해야 할 목표는 성숙이다. 개인과 사회 모두가 성숙해야 한다. 지난달 어느 국제세미나에서 한국의 가장 큰 정치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분이 "국민들의 정치참여가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참여자의 질적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나라가 독재를 벗어나야 했던 시기에는 사회적, 국민적 목표가 민주화 즉, 독재를 벗어나는 것 그 자체로 단순했기 때문에 참여자의 민주시민 의식이 매우 잘 가꾸어진 것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진척과 함께 사회 구성원들의 요구가 다양해지고 강력해졌기 때문에 과연 필요한 것인지,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하는지, 어떤 단계로 구분하여 진행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식견이 있고, 다른 사람의 주장을 경청해서 자신의 견해에 수정하거나 철회할 부분이 없는지를 살필 수 있는 수준의 참여자 수가 많아져야 한다.
사회 지도층과 여론 주도층의 질적 수준이 향상되면 사회 일반의 수준도 따라가게 된다. 어떤 외국 학자가 한국을 '붐(boom)'사회라고 불렀다. 일순간 확 타오르는 무엇은 있지만, 금방 식고 꺼진다는 것이다. '붐' 속성으로 인해 IMF의 힘든 시기에 세계 유래 없는 '금모으기,' 2002월드컵 때 '오 필승 코리아'가 가능했을 수 있다. 그것은 장점이다. 그러나 차분함과 냉철함과 진득함이 사회적 성숙에는 더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현재 골칫거리 중 하나인 '악플러' 현상도 대표적인 미성숙 사례다. 공중파 TV에서 쏟아져 나오는 'S라인'과 '식스팩' 타령도 그렇다. 공중파와 젊은이들의 입에서 인격과 품성의 중요성이 진정 많이 회자될 때 우리 사회도 성숙의 시기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겉치레와 껍데기가 내실과 알맹이에게 본래의 자리를 돌려준 사회여야 한다.
사회적 성숙은 정책의 알맞음과 충실함의 실현이어야 한다. 가벼운 예들을 들어보자.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조망하는 곳이 시멘트로 덮여 있다. 황령산 중턱에는 사용자가 없는 실내스키장이 버티고 서 있다. 젊은이들의 일자리 창출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늘어가고 확대되는 것은 각종 축제다.
그러면서 누구도 책임지는 이가 없다. 지나간 일을 들추는 것이 해당 인사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법령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허락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은 충직한 공인의 길이 아니다. 황령산이 가진 공공재의 성격을 충실히 검토했다면 결정은 달리 내려졌을 것이다. 지나다니는 시민들이 황령산에 괴물처럼 서 있는 시설을 보면서 저것을 허락한 기관과 관계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을 지금도 한다.
칭찬 일색의 소수, 비판 일색의 소수는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다. 이제, 발전의 주역이었던 과묵한 다수가 성숙을 위해 나설 때다.
경성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