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비왈자(鹿皮曰字)라는 성어가 있다. 부드러운 사슴가죽에 '가로 왈' 자를 써서 세로로 잡아당기면 '날 일(日)' 자로 보인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과 함께 때에 따라 편하게 행동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사실 세상사 많은 일은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포괄적으로 보면서도 중심을 잡아 대처하는 일이다.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최초의 북미 고위급대화가 끝났다. 지난 8일부터 2박 3일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보즈워스 특별대표는 10일 서울에서 "(북미 간에) 6자회담의 필요성과 9·19 공동성명 이행의 중요성에 대해 공통의 이해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6자회담 복귀 시기와 방법은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라면서 6자회담 당사자 사이에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보즈워스의 방북 결과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오랜만의 회합에서 이룩한 '공통의 이해'에 주목한다면 성과는 긍정적이다.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이어진 그동안의 갈등과 위기 상황을 해소하기 위한 첫 만남으로서 비교적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미국도 2차 핵위기로 이어진 전임 부시정부 초기의 대화처럼 강경일변도로 나가지 않았고, 북한 역시 8월 클린턴 전 대통령 방북 이후 이어온 6자회담에 대한 유연한 태도를 다시 한 번 표명했다.
그렇지만, 당면 과제인 6자회담 재개가 여전히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결과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북한은 비핵화와 6자회담 필요성에 관한 원칙적 입장을 보이면서도 미국에 대해 적대관계를 우선 청산해야 한다는 그동안의 요구를 철회하지 않았다. 미국 역시 6자회담이 재개되어 비핵화가 진전되면 평화체제와 관계 정상화 등 핵심 이슈들이 논의되고 이행될 것이라는 입장을 반복했다. 미국무부의 크롤리 차관보는 10일 열린 정례 기자회견에서 "북한은 미국 정부가 보기를 원하는 선을 넘어서지 않았다"고 발언했다.
이처럼 엇갈린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현재까지 당사국의 분위기는 대체로 낙관적인 듯하다. 보즈워스 대표부터 회담 결과가 유익했다는 입장이고 그동안 강경한 비핵화 원칙을 강조했던 클린턴 미국무장관도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북한 외무성은 11일 대변인 답변을 통해 "상호 이해를 깊이 하고 견해 차이를 좁혔다"며 모처럼 부드러운 표현으로 평가했고, 우리 정부의 고위관계자 역시 잇따라 긍정적 진전이라고 발언하고 있다. 특히 북미 양국이 6자회담이 재개될 경우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4자대화'에서 논의하기로 양해했다는 소식은 흥미롭다.
아마도 아프간 전쟁과 이란 문제, '핵 없는 세계' 구상 등 미국 정부가 직면한 첩첩한 안보 과제를 고려할 때 미국의 회담 관계자들은 첫 대화에서 실패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핵 상황이 더 악화된다면 오바마 대통령의 국정 능력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할 터였다. 북한의 당국자들 역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 등의 권고를 받아들여 비핵화 원칙과 다자 대화 입장을 천명한 마당에 또다시 안보위기로 치달을 수 있는 대화 결렬을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현재 북미의 입장차는 쉽게 해소되기 힘들다. 북한이 주장하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 철회나 미국이 주장하는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회담 우선 재개는 그동안 반복되어 온 쌍방 간 적대적 논의구조의 재현에 다름 아니다. 기존의 원칙적 입장을 반복하면서 조심스러운 탐색적 대화를 거듭해서는 해묵은 북핵 문제를 풀 수 없다. 당장의 위기 재발은 모면할지라도 이는 다가올 위기가 연기되는 데 불과하다.
오랜 기간 대북 외교의 핵심 쟁점으로서 우리 안보의 발목을 잡아온 북핵 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위한 당사국 간 집중적 노력을 더 미룰 수는 없다. 보즈워스가 밝힌 대로 의제는 이미 9·19 공동성명에 다 포함되어 있다. 비핵화와 평화체제, 관계 정상화와 경제지원 등 핵심 이슈를 함께 타결짓고 실제 이행하기 위한 포괄협상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할 때다. 그것이 곧 6자회담 재개의 시간표가 될 것이다. 인내심과 함께 창의력이 필요하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방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