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해군 병사들의 유해가 수습되면서 자식을 잃은 어머니는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죄스러워" 아무것도 못 하고 망연자실 허공만 쳐다보고, 아버지는 몰래 화장실에 들어가 울음을 삼킨다. 이들의 슬픔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군대에 보낸 사랑하는 육친을 잃은 유가족들의 슬픔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정말 슬퍼봤소?" 1974년 2월 22일 통영 앞바다에서 해군 예인선(YTL)이 뒤집히는 사고로 유일한 혈육인 동생을 잃은 형은 이렇게 물었다.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막 전역한 스물다섯의 청년인 그는 이미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재혼한 아버지도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난 터였다. 스무 살짜리 동생은 해군에 입대한 다음 미처 수영을 배우기도 전에 이순신 장군을 모신 통영의 충렬사를 참배하고 돌아오다 한산도 앞바다에서 수중고혼이 되고 말았다.
당시의 사고는 전투가 아닌 해난사고로 159명의 해군과 해경이 사망한 세계해군사에 기록될 만큼 엄청난 참사였다. 유족들은 진해에 마련된 빈소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시신이 화장 처리되어 한 줌의 재가 되어 나올 때까지 몇 날 며칠을 울부짖으며 기다려야 했다. 영현부대의 화장용 트레일러를 총동원했는데도 워낙 희생자가 많다보니 화장을 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슬픔으로 먹는 것, 자는 것을 잊어버렸던 유족들도 결국 살아있는 인간인지라 시간이 지나면서 허기를 못 이겨 밥을 찾고 지친 끝에 잠에 곯아떨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밥이 설었네, 반찬이 시원찮네,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자기 육친은 화력이 좋은 몇 번 트레일러로 화장을 해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였다. 때로는 순서를 다투느라 유족들끼리 멱살잡이를 하며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아귀아귀 밥을 퍼먹다가 숟가락을 쥔 채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새우잠을 자다가도 울컥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에 복받쳐 이불을 흥건히 적시기도 하였다.
이런 슬픔과 고통과 분노와 욕망과 본능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는 문득 자신이 바로 생사의 번뇌에 갇혀 발버둥 치는 어리석은 중생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동생의 유골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한 다음 속리산 법주사를 찾아 머리를 깎고 출가한다. 그의 법명이 명진이다. 현재 서울 강남의 봉은사 주지 스님이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우연한 기회에 명진 스님을 만나 그가 출가하게 된 사연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해인사와 봉암사를 비롯한 여러 절집에서 철마다 거르지 않고 참선 수행을 한 수좌답게 자신의 고통스러운 가족사도 담담하고 여유롭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객관화하여 묘사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의 말에는 지극한 슬픔을 통해 우리 같은 세속적인 인간들이 추구하는 명예와 돈, 권력, 욕망의 허망함을 꿰뚫고 뛰어넘은 자의 진정성이 담겨 있었다. 지극한 슬픔은 진실을 깨닫게 하나니,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허수경의 시)
그는 탈속한 수도승이지만 세속의 인연에도 무심하지 않았다. 조영래 변호사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송광사의 조그만 암자에 파묻혀 고인의 천도를 위해 혼자서 백일기도를 드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봉은사에서 천일기도를 하던 중 신도인 권양숙 여사의 간청으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하여 불교의식을 집전하고 천일기도를 끝낸 후 제일 먼저 용산참사 현장을 찾아 유가족들을 위로한 것도 힘없고 약한 이웃에 대한 그의 지극한 연민에서 비롯된 그다운 보살행이었다. 그 자신이 바로 유가족이었으므로 유가족들의 고통과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님의 행적을 세속적 잣대로 좌파니, 진보니 하고 찧고 까부는 것은 본말이 뒤바뀐 말법시대의 말장난일 뿐이다. 온갖 구실로 병역의무를 회피한 자들이 안보와 애국을 독점하고, 불법과 탈법으로 권력과 돈을 움켜쥔 자들이 국민에게 정직하라고 훈계를 하는 세상이 바로 말법시대가 아니고 무엇인가. 명진 스님의 죽비 같은 법문을 듣고 대오각성하기 바란다. "문제는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라 정직하냐, 정직하지 않으냐에 있다. 허언필망(虛言必亡), 거짓말을 하는 자는 반드시 망하는 법이다."
영남대 독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