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시피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대선주자 가운데서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는 정치인이다. 4·27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은 참패했어도 박 전 대표는 여전히 잘 나가고 있다. 그는 2위 주자와의 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변함없이 지지율 선두를 달리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후반기에 접어들어 대통령과 여당의 인기가 급락하고 있어도, 여당에 속한 박 전 대표가 오히려 이 대통령의 대안처럼 인식되는 묘한 현상도 발견된다.
여권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도 유독 박 전 대표만 건재하자, 한나라당의 구성원들은 박근혜라는 밧줄이 내려와 자신들을 구해주기를 기대하는 모습이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민심이반에 직면한 한나라당 사람들이 의지할 곳은 박 전 대표 밖에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보선이 끝나자마자 등장한 것이 '박근혜 역할론'이었다. 침몰해가는 여권을 구하기 위해 이제 박 전 대표가 나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더 나아가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논객들 사이에서는, 표류하고 있는 여권을 방치하고 있는 박 전 대표를 향해 무책임하다며 질타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요지부동, 앞에 나설 기미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재보선 직후 대통령 특사로 출국하면서 일정한 역할의 가능성을 내비쳤던 그녀는 정작 그 이후 입을 닫아버렸다. 과학벨트 입지 선정, 반값 등록금 추진과 같은 대형 정책을 둘러싸고 여당 내부가 떠들썩해져도 자신의 입장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한나라당 내에서 쇄신을 둘러싼 논란이 뜨거워져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단지 황우여 원내대표를 통해 전당대회 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할 뿐이었다. 박 전 대표를 만나고 돌아온 황 원내대표는 수첩메모를 보며 당권-대권 분리, 대표-최고위원 분리 선출, 선거인단 확대 등에 대한 박 전 대표의 의견을 전했다. 이렇게 박 전 대표가 당내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고 굳이 황 원내대표를 통해 의견을 밝힌 방식은 당내에서도 시빗거리가 되었다. 이날의 광경을 보면 앞으로도 상당기간은 박 전 대표가 직접 앞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든다. 결국 재보선 이후 한나라당 안팎에서 제기된 '박근혜 역할론'을 박 전 대표는 일단 거부한 셈이다.
박 전 대표의 이러한 선택은 대선을 향한 전략적 행보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차기 대선을 앞두고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의 결과로 보인다. 즉, 대선판세의 변동을 막기 위해서는 박 전대표 자신이 전면에 나서 정치적 책임을 지는 판을 만드는 상황을 가능한 한 늦추겠다는 전략적 포석이 깔려있을 법하다. 쉽게 말하면 안전위주의 행보로 대선까지 가겠다는 의미이다.
이런 얘기가 나오면 박 전 대표는 국정운영은 대통령, 당은 지도부가 책임질 일이어서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의 장면 자체가 그리 정상적으로 비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는 여권 내에서 이 대통령 다음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큰 사람이다. 자신이 원하든 아니든, 그만큼의 역할과 책임도 따르는 위치이다. 그런 정치지도자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고 여러 현안들에 대해 침묵하거나 방관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지 못한다. 국민 사이에서 의견이 갈라지는 문제에 대해 정치지도자가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국민에게 설명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자 책임이다. 정치지도자의 역할이 반드시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만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박 전 대표는 유난히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피하는 정치적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여권이 표류하고 있어도, 한나라당 정권의 국정이 국민의 신뢰를 잃고 있어도, 나는 잘 나가니까 지켜만 보고 있으면 된다는 식의 모습은 정치지도자로서 온당한 처신이 아니다. 이제는 박 전 대표도 국민 앞에서 입을 열고, 그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검증과 평가를 받는 일을 피해서는 안 된다. 나라를 책임지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정치인이라면 국민이 어려울 때 그 옆에서 동고동락을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