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밤이 지나 새벽이 찾아오면 봉하마을을 향해 출발한다. 퇴임 후 참 많은 사람이 그곳을 찾았다. 그의 편안해진 얼굴을 보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못했다. 서거 후 엄청난 인파가 그곳을 향했다. 비장하고 상처받은 표정들이었다. 평생 '지는 쪽'에 서는 것이 더 익숙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리라. 기적 같은 선거 승리가 있었지만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었다. 모욕과 멸시와 음해로 지새야 했던 5년이었다. 대통령이 아니라 차라리 동네북이었다. 그 모든 과정이 자기 일처럼 아팠던 사람들이 봉하로 향하는 것이다.
대선결과가 나온 날 밤 아내가 입술을 떨며 외치듯이 말했다. "우리 봉하마을 가자!" 그동안 우리 부부는 한 번도 그곳을 찾지 못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마음속에 봉하가 있다고 여기던 터라 굳이 바쁜 짬을 낼 필요를 못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가보아야 한다. 무언가 생각을 정리해야만 한다. 언론에서 '노무현 정신의 유통기간은 끝났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렇게 된다는 말인가? 아내는 내과의사, 나는 문화 언저리의 사람이다. 정치와 직접적인 연이 닿은 적도 없고 공교롭게 둘 다 서울에서 자란 북한 피란민의 자손이다. 지역감정, 지역색이 어떤 건지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런데 도대체 이 망연함, 봉하의 묘비 앞에 서서 크게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은 이 갑갑함은 왜일까.
노령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새누리당 후보는 청년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민주당 후보를 이겼다. 사람들은 어떻게 말할까. 분노한 50대가 철없는 20, 30대를 응징했다고들 한다. 심지어 애국보수가 친노종북좌파를 물리쳤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노무현 프레임에 갇힌 문재인과 김대중 유산을 수용한 박근혜의 대결이었다는 진단도 있고, 중도 무당층의 경제적 불안감이 안정을 희구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선 후 한 달 동안 쏟아진 말, 말, 말들…. 그럼에도 무언가 크게 한 가지가 빠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대통령 선거는 이긴 쪽이 선이 되는 스포츠 게임도, 인기와 흥행이 대세를 가르는 가요제전도 아니다. 승패를 넘어서는 더 큰 잣대가 이 거대한 국가행사에 깔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시대교체라는 과제를 의미한다. 놀랍게도 박근혜 후보까지 선거 슬로건으로 활용했던 시대교체라는 용어는 재야원로 원탁회의가 제창한 '2013년 체제론'에 출전을 두고 있을 것이다. 과연 이번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7년 체제를 극복할 시대교체의 토대가 마련되었는가. 보수대연합이라는 구도적 승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대교체의 절박성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변치 않는 역사의 법칙이 있다. 급격한 성장을 달성한 국가에서 그 성장을 주도한 세력의 지배력이 장기화, 고착화되면 반드시 쇠망의 길을 걷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회세력은 교체되어야 하고, 계층의 유동성은 넓어져야 하고, 신진세대의 주도권이 확장되어야 한다. 변혁이 절실한 시대의 고비에도 이른바 '어르신' 또는 기득권 세력은 그 용틀임을 잠재우고자 기도한다. 외적의 공포를 과장하고 내부의 불안감을 조장하여 현실 안주 심리를 불러일으킨다. 기득권 영속화, 오로지 그것이다. 과연 한국의 유권자들은 세계경제질서의 대변혁기, 자본주의 재구성에 돌입한 이 시점에 어떤 선택을 한 것인가.
봉하마을에는 한 시대의 막내가 잠들어 있다. 새 시대의 맏형이 되고 싶었으나 구시대의 막내가 되고 말았다는 탄식이 함께 묻혀 있다. 그를 영원히 잠들게 했던 퇴행의 시스템은 다시 한 번 승리를 구가했고 새 시대의 열망은 산산이 흩어져 자조의 나날을 보낸다. 머지않아 그 상당수는 봉하의 곁을 떠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인지 몰라'라고 하는 청산파, '안 되는 놈은 영영 안 되는 거야'라고 하는 포기파 또는 숙명론자…. 생전에 한 번도 실물을 보지 못했으나 마치 집안 형님 같은 친근감을 주는 그 '못나고 못난' 대통령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실까. 몇 시간 후면 그의 묘석 앞에 선다. 지지자라면 누구나 말한다. 당신이 다 옳았던 것은 아니라고. 그럼에도 수많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당신이 새로운 세상을 꿈꾼 대통령이라는 사실이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지 않는 세상, 정의로운 세상 말이다.
시인·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