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후반에 공부를 한답시고 고향 집을 떠났다. 혈기방장한 나이에다 어른이 다 됐다고 느꼈던 때라 부모님 품을 벗어나는 것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성적이 올라가지 않는 것을 빼면 나름 생활도 재미있었다. '자유란 이런 것인가'라는 식의 치기 어린 감탄도 많이 내뱉었다.
참, 한 가지 좋지 않는 것이 있기는 했다. 자취집 주인 가족의 저녁식사였다. 온 가족이 '호호하하' 떠들며 숟가락 놀리는 소리를 자취방에서 혼자 앉아 듣는다는 것은 거의 고문수준이었다. 다 컸다고는 하지만 막내로 지내다가 막 집을 떠난 10대 소년이었던 까닭이다. 그때부터 '집밥 먹는 즐거움'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겼는지도 모르겠다.
2014년이 시작됐다. 모두가 적어도 한 가지 희망은 품었을 터다. 작심삼일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꿈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대개는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고 가정이 화목하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새해가 밝아도 가족 곁으로 돌아가기 힘든 사람들이 많다. 일이 바빠서 그렇다면 위안이나 될 수 있을 법하다. 그러나 경남 밀양이나 창원, 진주 등에서는 다른 이유로 한데에서 찬바람을 맞는 이들이 있다.
밀양 영남루 맞은편에는 지난해 12월 2일 음독한 뒤 나흘 만에 숨진 유한숙(71) 씨의 분향소가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전력의 밀양지역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10여 명의 주민들이 농성을 하는 중이다. 오늘로써 25일째다. 노인이 대부분인 이들은 농성장 바닥에 깐 전기장판에 의지하며 한겨울의 삭풍을 견뎌낸다. 비닐 천막 안에 신문지를 넣은 종이상자를 겹겹이 쌓아두었다지만 외풍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밀양시가 철거를 위한 행정 대집행을 예고한 상태인 데다 한전도 공사 강행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어 이들의 싸움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경남도청 정문 앞에서는 한 남자가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진주의료원 지부장인 박석용(45) 씨다. 그는 폐업이 확정된 진주의료원의 재개원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4월 경남도청의 고공 통신탑에 기습적으로 올라 진주의료원 폐업 철회를 요구했던 그는 100일 넘게 경남도청 앞에서 노숙 중이다. 초가을이었던 9월에 시작한 농성이 어느새 해를 넘겼다. 그는 고혈압과 당뇨 등을 앓고 있지만 진주의료원 재개원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농성장을 비우지 않겠다는 각오를 여러 차례 밝혔다. 진주의 의료원 본관에서도 노조원들이 재개원 투쟁을 1년 가까이 벌이고 있다.
지금와서 새삼스럽게 송전탑 건설의 당위성 여부와 진주의료원 폐업이 정당했는가 등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사안을 바라보는 눈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누구의 손을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하루빨리 가족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새해에는 정치권이나 당국이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밀양 송전탑 사태나 진주의료원 폐업 등에 관한 것은 도민 개개인이나 시민단체 등의 힘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다. 국책사업이라 혹은 도정에서 꼭 필요하기 때문에 더 양보가 힘들다면 대안을 찾아야 한다. 밀양에서는 송전탑 건설 반대 주민들이 사회적 공론화 기구 구성 등을 주장하고 있다. 진주의료원에 대해서는 국회가 지난해 9월 재개원 방안을 마련해보라는 취지의 '공공의료 국정조사 결과 보고서'를 채택한 바 있다. 이는 달리 말해 타협의 여지가 여전히 존재하며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다는 말과 맥을 같이한다.
독자들이 현학적이라고 손가락질 할지 모르나 최근 책에서 읽은 노자 도덕경의 '척제현람(滌除玄覽)'이란 구절을 인용해본다. '(스스로)섬돌을 닦고 어두운 곳을 살핀다'라는 뜻인데, 위정자가 이렇게 백성들을 대해야 한다는 은유적 의미라고 한다. 송전탑 사태 등에 빗대자면 농성장의 노인들이 집에서 편하게 밥 먹고 쉴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행복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잖는가.
사회2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