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진에서 종종 보듯이 구한말 조선인들은 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성인 남자 기준으로는 요즘보다 4배쯤 먹었다고 한다. 조선인들의 폭식은 당시 외국인 여행가들의 기록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폭식은 밥 이외의 다른 먹거리가 부족했던 이유도 있겠지만, 식량을 아껴봐야 수탈당하기 때문이었다. 1894년부터 1897년에 걸쳐 네 차례, 11개월 동안 조선을 여행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한민족은 게으르고, 의존적이고, 불결하고, 나약한 것으로 인식했다. 비숍이 ‘동학 혁명군’을 ‘무장한 개혁자들’로 표현할 정도의 안목이 있었음에도 그랬다. 하지만 비숍은 조선에서 이주해온 두만강 유역 시베리아 한인촌을 방문한 뒤, 자신이 틀렸다고 여행기에서 밝혔다.
“이곳의 한국 남자들에게는 고국의 남자들 특유의 풀죽은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토착 한국인들의 특징인 의심과 나태한 자부심, 자신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이, 주체성과 독립심, 아시아인의 것이라기 보다는 영국인의 것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다움으로 변했다.”
지배층의 부정부패와 수탈시스템이 없어지자 같은 민족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요즘 용어로는 제도가 경제적 번영을 좌우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를 더 풍부하게 발굴하고 학술적인 용어로 책을 쓴 학자가 202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세모글루이다. 그는 로빈슨 교수와의 공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지리적·역사적·인종적 조건이 아니라 ‘제도’가 국가의 성패를 가른다고 서술하면서 남한과 북한의 사례를 들었다. 남북한의 경제적 수준은 1945년까지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남한은 법치주의와 공정 경쟁,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포용적 제도’를, 북한은 독재와 권위주의를 기반으로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착취적 제도’를 채택하면서 오늘날의 격차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2022년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는 자신이 이 책을 읽었다며 추천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윤석열은 대통령이 된 뒤 법치주의를 무시한 ‘비상계엄’ 발동으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 했고, 그 결과 원화 가치와 주가는 폭락하고 소비심리가 위축되면서 자영업자들이 무너지고 있다. 경제성장률도 추락하고 있다.
제도가 경제적 번영을 좌우하는 것은 한 국가 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972년 대통령 박정희는 부산에서 새로 회사를 설립하거나, 기존 공장이라도 증설할 경우 다른 도시 대비 지방세를 5배 더 내도록 법을 제정했다. 일자리 창출의 주역인 제조업체들을 등 떠밀어 부산 밖으로 내보내는 이 법은 1995년에야 폐지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정치자금 적게 낸다고 부산 최대의 기업이었던 국제상사를 해체했다. 한때 한국의 견인차였던 부산 경제는 그렇게 이중삼중의 타격을 받으며 무너져갔다. 부산시민은 그래도 부산 경제를 속박하는 제도를 만든 정치세력을 일편단심 지지해왔다.
최근 간호사를 많이 채용한 서울의 한 신설 병원장의 이야기를 지인에게서 들었다. 부산 지역의 간호사들이 대거 취업을 희망해 원인을 물었더니 이렇게 응답했다는 것이다. “결혼하고 싶다. 그런데 부산에 있으면 월급 300만~400만 원 수준의 미혼 남성을 보기도 어렵다.”
다들 그렇게 부산을 떠난다. 2023년에는 1만1226명이, 2024년에는 1만235명이 수도권으로 떠났다. 일자리를 찾아 떠난 20, 30대가 80%를 차지한다. 외국의 언론들조차 부산의 ‘소멸 위기’를 보도한다. 산업은행이 부산으로 이전하면, 부울경 통합이 이루어지면, 부산의 미래가 바뀔 수 있을까? ‘괜찮은 일자리’가 계속해서 만들어질 수 있을까? 답은 ‘쉽지 않다’이다. 이전도, 통합도, 일자리 창출도 그렇다. 서울에 있는 공공기관을 ‘제로섬’게임을 통해 뺏어오는 것도, 행정통합이 실제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일자리 창출 효과는 여전히 미지수다.
‘괜찮은 일자리’는 대체로 ICT 산업과 대규모 제조업에서 만들어진다. 이들 산업의 공통점은 전력 소모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수도권 첨단산업에 제대로 전력을 공급하려면 향후 10년간 56조 원의 송배전망 투자가 필요하다. 송배전시설은 자연환경을 훼손해가며 산을 타고 넘어야 한다. 첨단산업에 신속하게 전력을 공급하면서 예산도 환경 훼손도 막는 방법도 있다. 수도권에 소형 원자력발전소라도 지으면 된다. 하지만 수도권의 누구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난해 10월 더불어민주당 허종식 의원은 지역별 전력자급률이 높으면 전기요금을 낮춰주자는 법안을 발의했다. 부산의 전력자급률은 174%이다. 위험부담을 안고 원전 가까이 살면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부산시 자료에 따르면 산업용 전기요금이 1% 늘어나면 지역 내 총생산이 0.01% 늘어난다. 제도만 바꾸면 기업들이 부산을 제 발로 찾아오고 지역에 ‘괜찮은’ 일자리들이 만들어지고 부산의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상수원에서 가장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부산시민은 전국에서 가장 비싼, 서울보다도 비싼 수돗물을 마시고 있다. 전기요금 산정 방식만은 왜 달라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