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兼亦誠懇無二·겸역성간무이
“화엄선사 지희가 만수산 무량사에 거처하면서 현릉(문종)께서 춘궁(동궁)의 질환을 낫게 해달라고 ‘법화경’의 글자를 극히 오묘하게 주조해서 찍어냈던 것을 다시 관목에 새겼다. 글자체가 아주 공교하고 새기는 것이 신이할 정도로 빼어나다. 신해(1491) 봄 2월에 시작해서 임자(1492) 여름 5월에 마쳤다. 일을 처리함이 정밀하고 상세할 뿐만 아니라, 정성스럽고 간절함도 비할 바가 없다.…”
“華嚴智熙居萬壽山無量寺 刊顯陵廟爲春宮有患疾所祈 鑄字法華經極妙 乃重雕焉. 字體甚工 鐫之異硏. 始於辛亥春二月 工訖于壬子夏五月. 非特處事精詳 兼亦誠懇無二.… (화엄지희거만수산무량사 간현릉묘위춘궁유환질소기 주자법화경극묘 내중조오. 자체심공 전지리연. 시어신해춘이월 춘흘우임자하오월. 비특처사정상 겸역성간무이….)
위 글은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쓴 글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불교학자 에다 토시오(江田俊雄)가 쓴 ‘조선불교의연구’(朝鮮佛敎の硏究·國書刊行會·1977)에 그 전문이 수록돼 있다. 지희(智熙) 선사가 1492년에 충남 부여에 있는 무량사에서 ‘법화경’을 간각한 뒤 이듬해인 1493년(성종 24)에 인쇄하여 반포하려고 했다. 당시 무량사에 머물고 있던 김시습이 1493년 2월에 발문(跋文)을 지었다. 위에 제시한 글은 그 발문의 앞쪽 일부분이다. 이 글을 쓰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시습은 59세 나이로 무량사에서 세상을 버렸다.
1455년 윤 6월 11일 조선 제6대 임금 단종(그해 14세)은 위협에 못 이겨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중흥사에서 공부하던 중 이 소식을 알게 된 김시습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관서 지역과 관동 지역, 호남 지역을 유람하고 경주 금오산에서 은둔했다. 그곳에서 한문으로 된 소설집인 ‘금오신화’를 창작했다. 그러다 환속해 재혼했다가 다시 관동으로 가서 만년을 보냈고 1491년 중흥사에 나타났다. 그 뒤로 무량사로 가 기식하다가 세상을 버린 것이다. ‘설잠(雪岑)’이라는 법호를 쓴 김시습은 속인인 듯 승려인 듯 부평 같은 삶을 산 문사였다. 시인·고전인문학자·목압서사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