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미사흔이 도망간 것을 알고 마침내 박제상을 포박하고 배를 풀어 추격했으나 마침 안개가 짙어 보이지 않았다. 박제상을 왜왕이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자 목도(木島)로 유배 보냈다가 얼마 뒤 사람을 시켜 장작에 불을 질러 몸을 태운 다음 목을 베었다. …”
…及出 知未斯欣之逃 遂縛堤上 行舡追之 適煙霧晦冥 望不及焉. 歸堤上於王所 則流於木島 未幾使人以薪火燒爛支體 然後斬之.(급출 지미사흔지도 수박제상 행강추지 적연무회명 망불급언 귀제상어왕소 즉류어목도 미기사인이신화소란지체 연후참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라의 충신 박제상(363~419)의 이야기이다. 위 인용문은 ‘삼국사기’ 열전(박제상전·朴堤上傳)에 실린 내용의 한 부분이다.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왕이 세상을 떠나자 실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실성왕은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셋째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첫째 아들 눌지는 태자였으므로 보내지 못했다. 하지만 눌지는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다른 나라에 가 있던 두 아우의 귀국을 추진했다. 삽량주간(歃良州干) 박제상이 그 일을 맡았다.
박제상은 고구려로 들어가 왕을 설득하여 복호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어 왜국으로 들어가서는 속임수를 써 미사흔을 돌려보냈지만, 자신은 죽음을 맞이했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김제상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눌지왕은 박제상을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가족에게 후하게 사례했다. 그리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박제상의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왕은 ‘우식곡(憂息曲)’을 지어 미사흔이 돌아온 기쁨을 노래했다.
‘삼국유사’에는 박제상의 부인이 울산 울주군과 경주 외동읍에 걸쳐있는 치술령(鵄述嶺·765m)에 올라가 왜국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어서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다. 민간에서는 그의 부인이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望夫石)설화가 전하고 있다. 치술령 아래에 지인이 있어 갔다가 예전에 그 고개로 산행한 기억이 나 박제상이 떠올랐다.
시인·고전인문학자·목압서사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