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영암군에 내려오는 사랑 이야기로, 남학명(南鶴鳴)의 문집 ‘회은잡설(悔隱雜說)’에 있다.
“홍랑은 홍원 땅 기생인데 절개를 좋아하고 자색이 있었다.(洪娘 洪原妓 愛節有姿色 ·홍랑 홍원기 애절유자색) 젊어서 최고죽(최경창)에게 사랑받았는데, 고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쌍성까지 따라갔다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함관령에 이르렀다.(少爲崔孤竹所願 及孤竹歸京師 娘追及雙城而別 還到咸關嶺·소위최고죽소원 급고죽귀경사 낭추급쌍성이별 환도함관령) 날은 저물고 비가 내려 침침해지니 노래 한 장(章)을 지어 고죽에게 부쳤다.(値日昏雨暗 作歌一章 寄孤竹·치일혼우암 작가일장 기고죽) 후에 홍랑은 고죽이 병이 난 소식을 듣고 그날로 떠나 이레 만에 서울에 왔다.(後 娘聞孤竹有疾 即日發行 凡七晝夜到京·후 낭문고죽유질 즉일발행 범칠주야도경) 그러나 나라의 금지령 탓에 머물 수 없었다.(然 以邦禁 不得留·연 이방금 부득류) 고죽은 병이 낫자 곧 홍랑을 보내며 시를 전했다.(孤竹病已 送娘 贈詩曰·고죽병이 송랑 증시왈) ‘말 못하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다가 향기로운 난초를 건네주니/이제 하늘 끝 저 멀리로 가면 얼마나 걸릴꼬/험관의 옛 노래를 그대여 부르지 마오/이제 청산이 비구름에 어둡네(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莫唱咸關舊詩曲·막창함관구시곡/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고죽이 죽자 홍랑은 얼굴을 훼손하고 파주에서 묘소를 지켰다.(孤竹沒後 自毁其容 守墓於坡州·고죽몰후 자훼기용 수묘어파주) 임진란이 터지자 고죽의 시집를 짊어지고 다녀 전쟁 불길을 면했다.(壬辰之亂 負孤竹詩稿 得免兵火·임진지란 부고죽시고 득면병화) 홍랑이 죽자 고죽의 묘 아래 묻어 주었다.(及死 葬孤竹墓下·급사 장고죽묘하)”
전남 영암 출생으로 1568년 급제한 최경창(崔慶昌·1539~1583)이 34세 때 북해평사로 함경도 경성에 부임했을 때 기생 홍랑을 만나 사랑했다. 홍랑이 법을 어기며 병문안 간 게 빌미가 돼 최경창은 파면되고, 45세에 암살당한다. 최씨 문중은 홍랑의 절개를 기려 선산에 묻었다.
시인·고전인문학자·목압서사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