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煮菜嘗茶不火煎·자채상차불화전
쓸쓸한 바람에 냉천 아닐까 의심했는데(瑟瑟初疑冷泉·슬슬초의냉천)/ 흐릿한 연기 솟아나는 것처럼 자욱해지네.(濛濛還似起昏煙·몽몽환사기혼연)/ 고승은 산중에서 납일 제사 지내는데(高僧座度山中臘·고승좌도산중납)/ 나물 익히고 차 마시는데 불 달이지 않네.(煮菜嘗茶不火煎·자채상차불화전)// 유황이 수원에 스며들었다는 말 믿지 않았고(未信硫黃侵水源·미신유황침수원)/ 아침 해가 몸을 씻는 양곡(暘谷)이라 여겼네.(却疑暘谷浴朝暾·각의양곡욕조돈)/ 땅이 외진 곳 있어 양귀비가 더럽히지 않았으니(地偏幸免楊妃汚·지편행면양비오)/ 지나는 나그네 잠시 따뜻한지 살펴보는데 거리낄게 뭘 있으리?(過客何妨暫試溫·과객하방잠시온)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시 ‘박공과 함께 동래욕탕지로 향하며 읊은 시 2수(동박공장향동래욕탕지점 2수·同朴公將向東萊浴湯沚占二首)’로, 그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 권12에 있다.
찻 번째에 납일(臘)이라는 시어가 있어, 음력 12월 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온천물이 뜨거워 나물도 익히고 찻물도 이 물로 쓴 모양이다. 두 번째 시에 양귀비를 언급하는데, 당나라 현종의 사랑을 받은 양귀비는 목욕하기를 즐겼다. 여기와는 거리가 멀어 그녀가 먼저 몸을 담그지 않아 다행임을 말하고 있다. 이규보 당시에는 온천 원수가 솟아나는 샘 아래에 못을 파 그곳에서 목욕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래온천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유사’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동래 온정에서 목욕했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으로는 이규보의 위 시가 처음이고, 울산에 유배됐던 정포(1309~1345)가 ‘동래잡시’ 10수 중 제7수(‘설곡집’ 권하)에서 동래 온천을 읊고 있다. 또한 연창군 박효수(?~1337)의 ‘온정(溫井)’이란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3, 동래현에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온천지역이 관광명소였다. 전국에 26개 온천이 있었는데, 그중 전국적으로 유명한 8개 온천 가운데 동래와 해운대가 들어있다.(‘조선’ 128호, 1926년 1월호)
온천장에 사는 고교 동창이 오늘 아침에도 “와서 온천도 하고 하룻밤 자고 가라”고 연락해왔다. 시인·고전인문학자·목압서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