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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204> 세상 풍파 생각하며 시 읊조린 고려 말 이집(李集)

지는 해에 기러기 울고 강 마을은 저무는데(雁聲落日江村晩·안성락일강촌만)

  • 조해훈 고전인문학자
  •  |   입력 : 2022-09-18 19:00:28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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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풍파는 가라앉았다 싶으면 다시 뜨는데(人世風波沒復浮·인세풍파몰부부)/ 이미 쉰 두 번의 봄가을을 보아왔다네.(已看五十二春秋·이간오십이춘추)/ 지는 해에 기러기 울고 강 마을은 저무는데(雁聲落日江村晩·안성락일강촌만)/ 한가롭게 새 시를 읊조리며 홀로 누각에 기대누나.(閒詠新詩獨倚樓·한영신시독기루)

고려 말 시인이자 학자인 둔촌(遁村) 이집(李集·1314~1387)의 시 ‘次牧隱先生見奇詩韻’(차목은선생견기시운·목은 선생 견기시의 운을 차운하여)로, 그의 문집 ‘둔촌유고(遁村遺稿)’에 있다. 목은 이색의 뛰어난 시를 보고 그 운자를 차운해 읊었다. 운자는 ‘尤(우)’ 운목(韻目)의 浮·秋·樓이다. 시인이 밝혔듯 52세에 위 시를 지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살면서 풍파를 겪지 않은 사람은 없다. 예전에는 관료가 정치인이었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정계에서 물러나거나 법적 감당을 하면 된다. 예전엔 죽느냐 사느냐 문제였다. 죽거나 유배 가야 했다.

이집은 고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한 문사로, 고려 말 어지럽던 시절에 살았다. 공민왕 때 권력을 휘두른 승려 신돈(辛旽)의 눈 밖에 나면 제거됐다. 이집은 다가오는 위해의 낌새를 알아채고 영천으로 도피해 목숨을 건졌다. 1371년 신돈이 죽자 개경으로 돌아와 다시 벼슬을 받았으나 바로 사직하고 현 경기도 여주시의 초야에 들어가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며칠 전 목압서사에서 멀지 않은 악양에 사시는 정암 이형규(89) 선생님과 함께 인근 ‘조씨 고택’에 들렀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로 알려진 고택이다. 악양초등학교 교감으로 퇴직하신 정암 선생님과 고택의 주인 조 모(98) 어르신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두 분 다 정정하신 모습으로 마루에 앉아 구재봉을 바라보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셨다. 어르신은 정암 선생님께 “당신 나보다 아홉 살 적으니 까불면 죽어”라는 농담까지 하셨다. 두 분 다 일제시기와 해방정국, 6·25 전쟁 등 어려운 시절을 겪으셨다. 필자는 60대여서 이분들에 비하면 아직 새파랗다. 가을 햇살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분의 가슴에 들어앉은 세상 풍파는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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