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년)12월 10일. 내가 유배의 길을 떠나 무릇 27일 만에 부령에 이르렀다. 길이 험난했던 것이나 눈바람으로 벌벌 떨던 일, 고을 관장들이 핍박하고 어르던 일, 관가 하인들이 못되게 하던 일들은 차마 붓과 말로 다 옮길 수가 없다. 또 본래부터 앓고 있던 피를 토하는 증세가 이때부터 더욱 심해져 날마다 간 조각 같은 핏덩어리를 서너 덩이 혹은 한두 덩이씩 토하곤 하였다. … ….
(丁巳年)初十日乙巳.
余自發配以後, 凡二十七日, 到富寧. 其行路之險阻, 風雪之凌兢, 州縣之逼脅, 輿儓之侵侮, 難以筆舌聲也. 且素病嘔血之症, 至此益甚, 日吐如肝片者三四葉, 或一二葉.((정사년)초십일을사. 여자발배이후, 범이십칠일, 도부령. 기행로지험조, 풍설지릉긍, 주현지핍협, 여대지침모, 난이필설성야. 차소병구혈지증, 지차익심, 일토여간편자삼사엽, 혹일이엽.)
위 문장은 담정 김려(1766~1822)가 쓴 ‘감담일기(坎窞日記)’에 나오는 1797년 12월 10일자의 내용 중 앞부분이다.
‘감담일기’는 1797년 32세 김려가 벗인 천주교인 강이천(姜彛天·1768∼1801)의 사건에 연루돼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유배 가는 동안의 일을 기록한 내용이다. 그해 11월 12일 김려는 형조에 갇혔다. 죄상은 ‘함께 모여서 서학(西學)에 대해 얘기를 나눈 것 등’이었다. 이틀 만에 유배형을 받은 그는 곧장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떠났다. 가는 도중 유배지가 변경돼 부령에 도착한 날이 12월 10일이었다.
부령은 원교 이광사(李匡師·1705~1777)가 유배를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장애애(張愛愛)란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은 다음 유배지인 전남 신지도까지 따라갔다. 김려도 이곳에서 그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는 연희라는 기생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김려는 부령에서 4년 유배를 살다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돼 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으로 이배됐다. 그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魚譜)인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썼다.
필자가 2년 전쯤에 어떤 매체에 김려의 어보에 대한 글을 실었는데, 지인이 놀러 와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하여 김려의 부령 유배와 연희와의 사랑 이야기를 좀 더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