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전을 부쳐(煮菊東籬下·자국동리하)/ 마을 사는 이들 불러 모았다네.(招邀洞裡人·초모동리인)/ 산천에 할일 없는 나그네여서(溪山無事客·계산무사객)/ 강호로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라네.(江海未歸身·강해미귀신)/ 걸쭉하게 술잔이 오가는 자리에서(艸艸盃盤會·초초배반회)/ 즐겁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참되다네.(欣欣笑語眞·흔흔소어진)/ 이렇게 노니는 일 이어가야 할 터인데(玆遊宜更續·자유의경속)/ 섣달에 피는 봄 매화 기다려야겠네.(留待臘梅春·유대납매춘)

위 시는 필운옹(弼雲翁) 김영행(金令行·1673~1755)의 ‘자국회를 열고 백욱·일원·자평 등과 시를 짓다(設煮菊會, 與伯勖一源子平同賦·설자국회, 여백욱일원자평동부)’로, 그의 문집인 ‘필운시고(弼雲詩稿)’ 제1책에 들어있다.

김영행은 김창흡의 문인으로, 아버지는 관찰사 김시걸이다. 음보로 현감이 되었다가 1723년(경종 3) 소론 김일경 등에 의해 노론 김창집의 일당이라 하여 파직돼 기장현(현 부산시 기장군)에 유배되었다. 1725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우사어(右司禦)로 다시 기용되고, 임천군수를 거쳐 중추부(中樞府)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옛 시인들은 음력 9월 9일 중양절 전후로 국화전을 부쳐 먹는 모임을 자국회(煮菊會)라고 했다. 김영행은 당시의 유명한 시인 이병연(李秉淵)과 그의 동생 이병성(李秉成) 등을 불러 자국회를 가졌다. 국화꽃 지짐을 부쳐 술을 마시며 걸쭉하게 놀았던 모양이다. 당연히 시회(詩會)도 가졌으리라. 이런 자리가 계속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말한다. 매화가 피면 또 시주(詩酒) 자리를 가질 게다. 가을에 국화가 피면 선비들은 벗을 불러 자신이 가꾼 국화를 함께 완상하면서 시주를 즐겼다. 올해는 양력으로 지난 23일이 중양절이었지만 목압서사 마당에 아직 국화가 피지 않고 있다. 피려고 노랗게 봉오리가 맺혀있다.

세상이 변해 시인이라고 해도 아내에게 국화전을 부치게 하고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신다면 비웃음만 살 것이다. 국화전을 부쳐줄 아내가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보면 옛 시인들의 낭만과 호기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