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색이 종이보다 더욱 희어서(雪色白於紙·설색백어지)/ 채찍 들어 이름자 휘갈겼네.(擧鞭書姓字·거편서성자)/ 바람아 불어서 땅 쓸지 말고(莫敎風掃地·막교풍소지)/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려 주려무나.(好待主人至·호대주인지)
위 시는 고려 시대 대 문장가 이규보(李奎報·1169~1241)의 ‘눈 속에 친구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여’(雪中訪友不愚·설중방우불우)로, 그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 8에 실려있다.
눈이 많이 내려 쌓인 날 이규보가 친구 집을 찾았다. 아마 친구가 다른 일이 있어 나간 모양이다. 이규보는 말을 타고 있었다. 그리하여 말 위에서 채찍으로 눈 위에 자기 이름을 썼다. 그리곤 바람에게 부탁하였다. 바람이 불면 눈 위의 이름이 지워지니 친구가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많이 알려진 시이다. 상징성과 이규보의 능청맞은 해학성도 돋보인다.
집주인이 와 자신이 방문했다는 걸 알 수 있도록 눈 위에 쓴 이름을 지우지 말라고 바람에게 부탁하는 표현은 시인이라고 다 할 수 없다. 대학생 때부터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며 위 시를 많이 인용했다. 언젠가 이 지면에도 한 번 써먹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제 고등학교 동창 다섯 명이 1박 2일로 필자가 있는 화개골로 찾아왔다. 정주와 김국진은 고교 3학년 때 같은 반 친구다. 다들 세월을 이기지 못해 머리 위에는 허연 눈이 쌓여 있는 듯했다.
마침 이날은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친구들은 화개장터에서 점심을 먹고 막걸리까지 한잔한 뒤 필자와 만나 커피를 마셨다. 친구들은 고교 때 같은 반을 했거나 졸업 무렵 서로 친해져 지금까지 가족처럼 지내오는 사이라고 했다. 햇수로 46년간 만나는 친구들이었다. 숙소 아래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반주를 마셨다. 다음 날 아침 불일폭포에 가자고 친구들은 호기롭게 말들을 했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김국진은 턴테이블과 LP판을 차에 싣고 와 숙소에서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생 때 듣던 노래를 틀었다.
이규보가 눈 위에 채찍으로 자신의 이름을 쓴 상황과는 다르지만, 눈 내리는 날 친구 중 가장 편한 고교 시절 친구들과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