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秋雨蕭蕭送薄涼·추우소소송박량
쓸쓸하게 내리는 가을비가 선선함을 보내오니(秋雨蕭蕭送薄涼·추우소소송박량)/ 작은 창 아래 단정히 앉아 있는 맛 깊고도 깊구나.(小窓危坐味深長·소창위좌미심장)/ 벼슬살이 시름 나그네 근심 모두 잊고서(宦情羈思都忘了·환정기사도망료)/ 향불 한 심지 피워 햇차 한 잔 마신다네.(一椀新茶一炷香·일완신다일주향)
위 시는 고려 말 문사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가을날 회포를 적다’(秋日書懷·추일서회)로, 그의 문집인 ‘목은시고(牧隱詩藁)’ 권 2에 수록돼 있다.
그는 중국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귀국하여 대사성(大司成) 등의 벼슬을 지냈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가 여러 번 불렀으나 절개를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위 시는 가을이 되어 선선한 바람이 불어 창가에 앉아 벼슬살이의 고단함 다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차를 한 잔 마시는 서정을 노래한다. 작은 창 아래에 고요히 앉아 있는 그 맛이 깊다고 한다. 이는 마치 명상하듯 마음이 고요하며 깊이 침잠한다는 말이다.
굳이 귀거래를 하지 않아도 집에 고요히 앉아 마음을 다스리며 차 한 잔 마시는 것으로도 충분히 은일(隱逸)할 수 있다는 표현이다. 즉 공자가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향리로) 돌아가야겠다, 돌아가야겠다(歸歟歸歟·귀여귀여)”고 하지 않아도 집에서 은한(隱閒)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제 밤부터 새벽에 추워 이불을 덮고 잔다. 목압서사가 있는 지리산에는 요즘 매일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가을장마가 제법 길게 있을 것이란 일기예보도 나온다. 필자 역시 아침저녁으로 거실에 앉아 창을 통해 맞은편 용강마을의 황장산(黃獐山·942m)을 바라본다. 하동 쌍계사 십 리 벚꽃길의 서쪽 산줄기인 황장산은 불무장등 능선 끝자락으로 섬진강에 그 꼬리를 내린다.
차를 마시면서 그렇게 앉아 있으면 달리 좌선(坐禪)이 필요 없다. 목압서사 옆에는 쌍계사가 있고, 위쪽에는 국사암이 있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목압서사 앉은 자리와 서사 바로 뒤쪽 김해 김씨 문중 차밭이 옛 목압사(木鴨寺) 절터이다. 이색의 위 시가 지금 계절과 필자의 일상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어 언급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