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 6월 초 7일 경신일에(維歲次壬寅六月甲寅朔初七日庚申·유세차임인유월갑인삭초칠일경신) / 아버지가 죽은 아들 성행의 묘에 고한다.(父告亡子省行之墓·부고망자성행지묘) / 슬프구나, 나의 아들아. 어질구나. 나의 아들아.(哀哉我兒 賢哉我兒·애재아아 현재아아) / 너는 능히 죽음을 감당하여 먼저 간 선인을 따랐구나.(汝能辦死 先人是隨·여능판사 선인시수) / 나는 이제 북쪽으로 옮겨가니 죽고 삶을 기약할 수 없구나.(吾今北遷 死生未期·오금북천 사생미기) / 무덤의 풀 위에 술을 붓지만 슬픔이 깊어 말을 이룰 수 없구나.(瀝酒墓草 哀不能詞·역주묘초 애불능사) / 아, 나의 아들아. 부디 이곳에서 길이 편안하거라. 흠향하라.(嗚呼我兒 其永寧斯 尙饗·오호아아 기영녕사 상향)
위 문장은 죽취(竹醉) 김제겸(金濟謙·1680~1722)의 ‘죽은 아들의 무덤에 고하는 글’(고망자묘문·告亡子墓文)’으로, 그의 문집 ‘죽취고(竹醉藁)’에 수록돼 있다.
김제겸 집안의 삶을 되돌아보면 참혹하다. 할아버지 김수항(金壽恒·1629~1689)은 기사환국 때 진도로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김수항의 맏아들인 김창집(金昌集·1648~1722)은 신임옥사 때 거제로 유배되었다가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김제겸은 아버지 김창집의 옥사에 연루되어 울산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중 큰아들 김성행(金省行)이 국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죽었다. 아버지 김창집이 사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마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김제겸에게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이 내려왔다.
1722년 음력 6월 7일, 그는 부령으로 향하던 길에 죽은 아들 김성행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아들의 혼령 앞에 위의 글을 남긴 것이다. 김제겸은 그해 8월 함경도 부령에서 사사되었다. 아들의 무덤 앞에서 “죽고 삶을 기약할 수 없다”고 말한 지 두 달 남짓 뒤였다.
당파 싸움의 안쪽으로 한 걸음 들어가 보면 아버지를 잃은 아들이 있었고,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있었다. 죽은 아들의 무덤 앞에서 술을 부은 뒤 자신 역시 살아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야 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필자는 오랫동안 이 집안의 관련 자료를 읽어오다 최근 글을 한 편 완성하여 학술지에 투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