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초 정관수술 해준 뒤 후회
- 평생 난임치료의 길 걷게 된 계기
- 이 분야서 국내 1세대 명성 떨쳐
정자와 난자가 만나 결합하는 건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수정이라는 마법이 성공할 확률은 겨우 3억분의 1에 그친다고 한다. 생명 탄생의 과정이 어렵다는 뜻이다. 결혼 연령이 점점 높아지면서 난임전문병원을 찾는 부부가 많다. 이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온 세화병원이 올해로 33주년을 맞았다. 국내 난임치료 분야 1세대인 이상찬(68) 병원장은 시험관 아기라는 말이 흔하지 않았던 1994년 부산에 병원을 설립해 지금껏 전국적으로 명망을 떨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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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찬 세화병원장은 “난임부부가 늘고 있는 만큼 생명윤리법을 현실에 맞게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
“레지던트 1년 차였던 1978년 7월 25일 긴급뉴스로 영국에서 시험관아기 시술로 임신이 돼 세계 최초로 2.7㎏ 여아가 태어났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당시엔 나와 별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전공의 생활을 하면서 이 분야의 중요성을 실감했습니다.”
이 병원장은 1980년 초 시행됐던 ‘산아제한정책’이 지도자의 정책판단이 한 나라의 경제발전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는 1981년 부산대 의대 산부인과 대학교수 발령을 앞두고 대한가족협회에서 난임시술을 했다. “정부 정책에 맞춰 복강경 난관수술과 정관수술을 많이 했던 게 원죄가 돼 평생 난임치료에 전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평생을 진료해도 원죄를 다 갚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게 감사합니다.”
부산대 의대 교수로 일하다 1985년 산부인과를 개원한 후 난임환자를 진료하면서 자신이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그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 당시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험관아기 시술 임신에 성공한 서울대학병원 산부인과에서 공부를 하게 됐다.
“잘되고 있는 병원을 하루아침에 폐업신고하고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다시 공부하는 제게 힘과 용기를 준 아내와 아이들이 고마울 뿐입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난임치료 연구를 한 후 1994년 세화병원을 개업했다. 개원과 함께 세화시험관아기 시술센터를 개설하고 그해 10월 국내 최초로 포배기배아이식 프로그램을 개발했으며, 11월에는 정자은행을 운영하면서 난임치료 기관으로 입지를 다졌다. 이 병원장은 1995년 환자의 임신을 위해 대리모 모집 광고를 일간지에 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1년에는 세화난임의학연구소를 개설하고 2005년에는 국내 최초로 시험관아기 배양액 특허를 획득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의료진이 함께 밤을 새우고 연구하면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 병원장은 ‘희망을 주는, 신뢰를 받는, 연구하는 병원’이라는 운영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늦은 결혼으로 38세 이상 난임여성이 병원을 많이 찾고 있습니다. 치료한다고 다 임신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 늘 마음이 불편합니다. 환자뿐만 아니라 다른 병원 의사들이 우리 병원을 인정할 수 있도록 늘 공부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해외에서 열리는 주요 의료 학회에 참석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 후 같은 병원 의료진에게 더 깊이 있게 공부해 발표하도록 한다. 또 1996년부터 난임과 가임력 보존 등에 대한 의료 지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마다 의료 심포지엄을 열고 있다. 그는 부산지역 최고의 병·의원 및 한의원 의료네트워크인 ‘부산메디클럽’ 회장을 역임하며 지역 의료계를 위해 큰 역할을 했다.
“난임 인구가 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생명윤리법은 현 세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난자공여 과정이 어렵고 법을 어겨야 난자를 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난임 인구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합니다.”
이 병원장은 난임치료가 저출산의 중요한 해법인 만큼 정부에서 종합적으로 지원책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이은정 기자 ejle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