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철 스님 추모 겁외사서 출발
- 9.6㎞ 원점회귀 '청정법신 코스'
- 산길엔 죽죽 뻗은 소나무 빼곡
- 경사 완만하고 솔잎 깔려 푹신
- 삼거리 두 번 지나 정상에 도착
- 능선 갈림길서 방향 조심해야
- 법륜암 가는 길에는 대숲 터널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매년 이맘때면 제기되는 의문이다. 하지만 풀 길 없는 화두인지 매번 처음 대하는 것처럼 낯설게 다가온다. 올해는 그 의문을 성철(1912~1993) 스님이 제공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다." 스님이 입적하기 전 부처님 오신 날에 남긴 법어의 일부다. 지난달 28일 산행하러 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엄혜산(234m) 기슭의 성철 스님 생가 앞 겁외사 마당에서 이 글귀를 새긴 비석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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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의 엄혜산 하산길. 남강으로 유입되는 양천이 벌판을 적시며 유유히 흐르고 있다. |
무슨 뜻일까? "모든 중생을 제도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부처님께 맹세한 지장보살의 서원에서 보듯, 부처님과 중생 구제는 불가분의 관계다. 또한 구원은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본질적 속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다니! 산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돌연 불가해의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하지만 꼬일 듯하던 의문의 실타래는 뜻밖에 산행 과정에서 자연스레 풀렸다.
청정법신(淸淨法身). 그 단초는 '한 점 번뇌가 없는 부처의 몸'을 의미하는 이 한 단어였다. 사람을 비롯한 중생의 본래면목이 부처라는 말인데, 신록이 짙어지는 봄 숲에서 청정법신을 본 것이다. 함초롬히 이슬 머금은 풀잎, 천연색 수채화 물감을 푼 듯 청초한 야생화, 파릇파릇 새순 돋는 나무, 옥구슬 구르듯 청량하게 흐르는 시냇물 등등 생명의 물결이 넘실대는 자연의 식구 중 어느 것 하나 따로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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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혜산 능선. 신록으로 옷을 갈아입은 솔숲이 더할 나위 없이 청정하다. |
조선조에 불교를 중흥했던 서산대사(1520~1604)의 설법에 이르면 이해는 더욱 명료해진다. 대사는 '도가귀감(道家龜鑑)'에서 "사람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했다. 사람의 근본인 자연이 청정하다면 사람 또한 청정하지 않겠는가. 해서, 대사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이같이 단언했다.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온 것은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것"이라고. 사람은 누구나 본바탕에 청정법신을 갖추고 있어 구원(물결)이 불필요하다는 뜻이다. 성철 스님이 "자기를 바로 보자"고 거듭 강조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두 고승대덕의 깨우침은 이번 산행을 '청정 산행'으로 일신시켰다. 산행은 겁외사를 출발해 엄혜산 정상을 넘은 뒤 남강변을 돌아 원점으로 회귀하는 코스다. 총거리는 약 9.6㎞로 4시간가량 걸린다. 겁외사에서 생태숲 쪽으로 100m가량 가면 엄혜산 등산로로 진입하는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을 지나 오른쪽 골목길로 460m가량 걸으면 갈림길에 이른다. 갈림길에서 엄혜산 정상 쪽으로 방향을 잡아 산길을 탄다.
산길 좌우에는 10m 이상 하늘로 죽죽 뻗은 늘씬한 소나무가 빼곡히 우거진 숲이 펼쳐져 있다. 눈은 물론 가슴 밑바닥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길은 경사가 완만해 별달리 힘이 들지 않는 데다 바닥에는 솔잎이 수북이 깔려 발걸음이 푹신하고 경쾌하다. 1.2㎞가량 산길을 타면 삼거리에 닿는다. 700m가량 더 오르면 삼거리를 또 만난다. 이곳에서 도내고개 쪽으로 100m쯤 가면 엄혜산 정상이다. 정상에서는 왼쪽으로 하산한다. 여기서부터 숲이 무성해 길을 식별하기 어려우니 반드시 본지 리본을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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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겁외사에 세워진 성철 스님 동상. |
20분쯤 후 능선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왼쪽은 힘들여 가꾼 고사리 밭이라 들어가선 안 된다. 진입금지 푯말도 세워져 있다. 10분가량 내리막길을 걸으면 임도가 나오고, 거기서 왼쪽으로 10분쯤 더 가면 콘크리트 포장도로에 내려선다. 낮은 바위 벼랑을 드러낸 엄혜산 기슭을 돌아 원지 쪽으로 나아간다. 30분가량 걸으면 토현교에 이른다. 토현교에서 양천과 남강을 끼고 30분쯤 더 가면 법륜암 갈림길을 만난다.
이곳에서 법륜암까지 650m가량 구간은 좁은 벼랑길 아래로 남강이 굽이쳐 흐르는 데다 중간중간 긴 터널을 이룬 푸른 대숲도 있어 경치가 자못 수려하다. 법륜암에서 다시 산길을 오른다. 20분쯤 가면 산행 초반 처음으로 거쳤던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1.76㎞가량 가면 출발지다. 길은 길로 이어져 처음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처음이 아니다. 자연의 정화를 거친 청정한 처음이다.
# 주변 가볼만한 곳
- 문익점 목화시배지, 무명옷 만들기 전시
성철 스님 생가에서 2㎞가량 떨어진 단성면 사월리에 목화 시배지가 있다. 1363년(공민왕 12) 문익점(1329~1398)이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붓통에 숨겨 들여와 자신의 장인 정천익에게 부탁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이를 기리는 전시관 2개가 조성돼 있다. 무명옷을 짜는 과정 등을 전시해 놓았다.
단성면 남사리에는 '남사예담촌'이 있다. '경북의 안동 하회, 경남의 산청 남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전통한옥마을이다. 40여 채의 기와집이 흙담길을 따라 미로처럼 이어진다. 최재기 가옥을 중심으로 성주 이 씨의 종가인 이상택 가옥, 사랑채가 돋보이는 연일 정 씨 가옥 등이 있다. 특히 이상택 가옥은 18세기에 지은 안채와 20세기 세운 사랑채가 공존해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 교통편
- 함양행 버스 타고 원지 하차
- 묵곡행 버스 겁외사서 내려
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함양행 시외버스를 탄다. 버스는 오전 5시40분부터 30~5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진주터미널을 지나 원지에서 내린다. 이어 원지정류장에서 묵곡행 버스를 갈아타고 가다 겁외사 앞에서 내리면 산행 출발지다. 묵곡행 버스는 오전 8시5분과 11시30분에 있다. 산행 후 귀가할 때는 오후 3시10분발 원지행 버스를 타면 된다.
문의=생활레저부 (051)500-5147 이창우 산행대장 010-3563-0254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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