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장경테마파크~해인사 7.5㎞
- 갱멱원·칠성대 신비감에 취하고
- 최치원 은거한 농산정 둘러보고
- 취적봉·음풍뢰 등 절경에 감탄사
- 낙화담 세찬 물줄기 속까지 시원
- 해인사서 '나를 깨우는 길' 마감
소리는 말문을 닫은 곳에서 비로소 열린다. 자기주장에 도취된 상태에서는 남의 말이나 다른 존재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하여,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남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소통의 전제 행위다. 지난 28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 소리길'을 걸으며 평범하지만 실행은 어려운 이 진리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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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공원구역 입구의 홍류동 계곡에 설치된 나무 덱. 온갖 침엽·활엽수가 우거져 폐부를 씻어내리는 맑은 공기가 실감된다. |
'묵언의 소리'일까.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소리길로 들어서 입 대신 귀를 세우니 묵언의 자리에 뭇 생명체가 소리로 날아들었다. 돌에 부딪치는 냇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흔드는 바람, 허공을 가르는 산새, 매복 병사의 습격처럼 자지러지는 매미…. 자연의 식구들은 저마다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한 세기 전 한 거사도 이런 경험을 시로 남겼다. '느릿느릿 호젓한 숲언덕 찾아가니(簫簫款段訪林邱·소소관단방림구)/골짜기 널린 돌에 부딪치는 물소리 청량하네(亂石喧豗萬壑流·난석훤회만학류)/꽃 지고 새 우는데 인적은 드물고(花落鳥啼人跡少·화락조제인적소)/구름 깊어 예 놀던 곳 모르겠네(雲深不辨舊時遊·운심불변구시유)'.
소리길 입구에서 200m쯤 올라간 길가에 세워진 표지판에 적힌 시다. 이곳은 '가야산 19경'의 하나인 '갱멱원(更覓源)'이다. 갱멱원은 '무릉도원을 상상하며 가야산을 바라보는 곳'이다. 고개를 들면 정면에 가야산에서 뻗어나온 매화산(1010m)의 날카로운 능선이 보인다. 금관과 곰 등을 닮은 7개의 암봉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가히 선계를 연상케 한다.
대장경테마파크에서 해인사(海印寺)까지 약 7.5㎞(3시간가량 소요)에 이르는 소리길에는 갱멱원을 포함해 가야산 16경이 산재해 있다. 길은 홍류동 계곡을 끼고 비단실로 수를 놓은 듯 이어진다. 자신을 내려놓고 그 빈자리에 16경이 빚어내는 소리를 채우며 걷다 보면 마음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참나'의 소리가 들릴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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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소리길의 종점인 해인사 입구. 수백 년 된 나무들의 위용이 눈길을 끈다. |
산행은 대장경테마파크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각사교를 건너 오른편 소리길 입구로 들어선다. 갱멱원을 지나 20m쯤 더 가면 '계곡에서 흘러온 꽃잎을 따라 올라간다'는 '축화천(逐花川)'에 이른다. 거사는 또 노래한다. '두건에 나막신 신고 구름 헤쳐 돌아드니(角巾蠟屐撥雲廻·각건랍극발운회)/겹겹 펼쳐진 병풍바위가 눈 앞을 가리네(畿疊嵓屛鬱未開·기첩암병울미개)/굽이굽이 계곡 길에는 푸른 이끼 서늘하고(磵路委蛇蒼蘚合·간로위사창선합)/졸졸졸 푸른 물에 꽃잎 떠내려오네(淙淙綠水泛花來·종종녹수범화래)'.
축화천에서 1.3㎞가량 가면 무릉동 사 거리가 나온다. 해인사 쪽으로 10분쯤 걸으면 무릉교가 계곡 위에 몸을 걸치고 있다. 여기서부터 국립공원구역이다. 나무계단과 덱을 지나 흙길로 내려선다. 소나무 굴참나무 노각나무 서어나무 등 어깨를 겯고 늘어선 온갖 침엽·활엽수가 푸르름을 다투고 있다. 무릉도원을 그린 수묵화 속으로 들어선 듯 홀연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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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발 작품. |
길과 계곡은 숨바꼭질을 한다. 구불구불 이어진 좁다란 길을 걷노라면 솜털 같은 이끼가 돋아난 바위벼랑이 앞을 막아섰다가 뒤로 물러나고, 백옥처럼 새하얀 돌들이 몸을 담근 맑고 푸른 계곡이 그윽한 자태를 드러냈다가 벼랑 아래로 자취를 감춘다. 북두칠성에 기도하는 '칠성대(七星臺)'와 해인사 매표소를 지나 400m쯤 가면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이 속세의 시비 소리가 들릴세라 은거한 산 밖을 계곡으로 둘러쳤다고 노래한 '농산정(籠山亭)'에 이른다.
나아갈수록 숲은 짙어진다. '선인이 내려와 피리를 불었다'는 '취적봉(翠積峰)', '풍월을 읊는 여울'이란 뜻의 '음풍뢰(吟風瀨)', '옥을 뿜듯이 폭포수가 쏟아진다'는 '분옥폭(噴玉瀑)', '비 갠 뒤 밝은 달 그림자를 담는다'는 '제월담(霽月潭) 등 절경이 잇따라 출현해 객을 반긴다. 500m쯤 걸으면 해인사와 길상암으로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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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탑. |
해인사를 향해 500m가량 더 가면 숨이 멎을 듯 웅장한 바위벼랑이 불쑥 다가온다. 족히 50m는 넘을 것 같은 벼랑은 희고 검은 바위가 층층 쌓였다. 위에는 푸른 숲이 우거지고 아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짙푸른 못을 이루고 있다. 그 못으로 흰 물거품을 흩날리며 세찬 물줄기가 벼랑을 타고 쏟아져 내린다. 낙화담(落花潭)이다.
1950년대 산골 주민들이 계곡수를 끌어들여 전기를 생산했던 간이발전시설과 '신선이 모여 논다'는 '회선대(會仙臺)'를 지나면 가야산과 매화산 등산로가 나뉘는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에서 1.1㎞가량 더 걸으면 산행 종착지인 해인사다. 소리길은 마침내 '만물을 비추는 불법의 바다(해인)'로 산행팀을 이끌었다.
◆주변 가볼만한 곳
- 최치원이 심었다는 전나무, 가야산 정상 우비정도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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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17경인 학사대. |
'가야산 19경' 중 소리길 구간의 16경을 제외한 나머지 3경은 각각 해인사와 가야산 중턱, 그리고 정상에 있다. 고운이 거문고를 켤 때 학이 날아 들었다는 '학사대(學士臺)'가 17경이다. 이곳은 해인사 응진전 서쪽 전나무를 심은 자리다. 고운이 거꾸로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수령이 250여 년 되는 이 나무는 고운이 심은 전나무의 후계목으로 보인다. 1757년께 후계목을 식재했다는 기록(백불암집)도 남아 있다.
18경은 가야산 중턱에 있는 '봉천대(峰天臺)'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마지막 19경은 가야산 정상인 상왕봉(1430m)에 있는 샘 '우비정(牛鼻井)'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중무(李重茂·1568∼1629)는 가야산 유산기에서 우비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정상에 두 우물이 있는데 서로 통하여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날이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장마비에도 넘치지 않는다. 이끼가 그 바닥에 가득 끼었는데도 맛을 보니 역시 달고 시원하였다."
◆교통편
- 부산서 대구서부정류장 이동, 해인사행 버스로 갈아타야
부산역에서 동대구행 열차를 탄다. 동대구역에서 내려 도시철도로 갈아탄다. 상당못역에서 내린 뒤 대구서부정류장에서 경남 합천군 해인사행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탄다. 이 버스는 오전 6시40분발을 시작으로 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가야합동버스정류장에서 내려 800m가량 걸으면 산행 출발지인 대장경테마파크다.
문의=생활레저부(051)500-5147 이창우 산행대장 010-3563-0254
이경식 기자 yisg@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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