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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부산이 좋다 <12> 용두산 엘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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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초겨울의 용두산

은행잎이 노랗게 뚝뚝 져 내리던 지난 24일 오후 용두산공원. 비둘기들이 수다를 떨어대는 공원광장에는 인간시장의 만화경이 펼쳐져 있었다. 할매할배들, 사오십 중년들, 청소년들, 아이들, 노숙자, 막노동꾼, 약장수 그리고 관광객들….
   
[용두산 '시의 거리'에 세워진 유치환의 '그리움' 시비. 용두산의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싯구가 가슴을 적신다.]
노인들은 햇볕좋은 벤치에 혼곤하게 진을 치고 “장이야, 멍이야”를 외치고, 노숙자들은 낮은 어깨를 웅크려 장기판을 기웃거린다. 종각 옆의 등나무 탁자위에는 미니 카세트가 숨가쁘게 ‘낭랑십팔세’를 부르고, 할매들은 두팔을 달삭달삭 엉덩이를 삐죽빼죽 흔들며 춤을 춘다. 할배는 무표정한 채 빈입만 쩝쩝 다신다.

소풍나온 여중생들은 비둘기가 좋아서 깔깔대고, 머리에 무스를 바른 남학생들은 힙합댄스를 돌려댄다. 젊은 연인들은 꽃시계 앞에서 사진을 찍고, 그 틈새로 가이드를 앞세운 일본 관광객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부산타워로 몰려간다.

꽃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근·현대사의 축도판

용두산은 그냥 산이 아니다. 겉보기엔 높이 60m, 면적 2만2천여평의 작은 산이지만, 기운은 예사 상서롭지 않다. 백두대간이 남하해 금정산맥으로 솟구치고, 부산으로 숨어든 수정산의 지맥이 바다를 향해 용솟음치듯 등성이를 이룬 곳이 용두산(龍頭山)이다. 그 용의 꼬리짬 되는 곳이 용미산(龍尾山=일명 東山), 옛 시청 자리다.

향토사학자 최해군씨의 용두산 풍수지리를 들어보자.

“왼쪽에는 좌청룡의 이름그대로 용당(龍塘) 용호(龍湖)가 동쪽을 둘러싸서 지키고, 서쪽에는 천마산(天馬山) 장군(將軍)반도가 범의 위세로 웅크리니 우백호다. 북쪽은 구봉산(龜峰山)이 이름그대로 거북의 형상으로 엎드렸고(북현무), 남으로는 영도 봉래산(蓬萊山)이 바다로 뻗치니 남주작이다.”

탁견이다. 최씨는 “부산에 이만한 명당은 없다”고 말했다.

용두산은 바로 그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조선시대 때는 초량왜관이 용두산 동쪽과 서쪽에 들어섰고, 1876년 개항후엔 일본인의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로 탈바꿈했다. 한일합방 후에는 저들의 신사(神社)가 또 용두산을 차지했다. 일제는 용머리(龍頭)가 뻗어내린 중앙동 부산우체국 뒤편 산자락을 끊어 길을 냈고, 1945년 4월 용두산 1만2천평을 공원지대로 지정,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몇 달뒤 패망했다.

드디어 광복. 부산사람들은 신사를 부수고 용두산을 끌어안았다. 감격도 잠시, 전쟁이 터졌다. 몰려든 피란민들은 용두산 주위에 빽빽이 판잣집을 지었다. 고기상자를 잇대어 루핑을 갖다붙인 판잣집촌에 54년 한겨울 큰 불이 났다. 이때 판잣집이 정리되고 나무가 심어졌다. 구비구비 한많은 용두산이다.
   
[헬기에서 찍은 용두산공원의 전경. 우뚝 솟은 부산타워가 용의 뿔을 연상케하는 등 전체 모양새가 용머리(龍頭) 형상이다.]
#조형물에 각인된 역사

용두산공원에는 유적과 조형물이 즐비하다. 하나하나가 부산의 발자취다. 부산타워(120곒·73년 건립)를 정점으로 공원 가운데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55년 건립)과 꽃시계(73년 제작)가 있다. 이순신 동상은 풍상에 씻겨 청동갑옷이 검게 변색됐다. 직경 10곒의 시계밭에는 현재 연목단(양배추의 일종)이 곱게 가꿔져 있다.

공원의 오른쪽에는 ‘4.19 민주혁명 희생자 위령탑’(61년 국제신문 건립)이 우뚝 서 있고, 왼쪽에는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의 흉상과 용두산의 지명유래를 전해주는 ‘용 조각상’이, 그 아래엔 ‘부산시민의 종’(97년말 제작)이 늠름하게 자리해 있다.

정상에는 일본의 신사터가 매운 역사의 현장으로 남아 있고, 동광동 부산호텔 뒤 비탈에는 왜관 석축이 있어 먼 과거 한자락을 정지화면으로 불러온다.

#엘레지는 그리움을 낳고

세월과 함께 많은 것이 변했다. 음습한 판잣집들은 가라오케로 둔갑했고 일백구십사계단(광복동쪽 진입로)에는 에스컬레이터(98년3월 가동)가 놓였다. 그 시절 ‘금순이’는 모두 할매가 되었고 광장에는 뽕짝 대신 디스코와 랩이 울려퍼진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말자/한발 올려 맹세하고 두발 딛어 언약하던/한계단 두계단 일백구십사계단에/…/아--못잊어 운다’(‘용두산 엘레지’ 고봉산 노래)

용두산은 추억의 가마솥이다. 더운 마음으로 다가가면 추억의 훈김이 피어난다. 설운 사연을 껴안고 눈물의 고갯길 넘어온 사람들은 용두산이 그리워 오늘도 용두산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용두산은 비단 노인들만의 쉼터가 아니다. 용두산은 남녀노소, 있는 자, 없는 자, 소외된 자, 절망하는 자들까지 죄다 품는 인간시장의 해방구다.

청마 유치환은 용두산 ‘시의 거리’(옛 미문화원쪽 진입로)에 그리움을 돌에 새겨 놓았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일찌기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유치환의 ‘그리움’ 중에서)

‘시의 거리’ 언덕빼기에는 동백나무가 꽃몽우리를 틀었다. 성급한 몽우리 몇개는 벌써 꽃을 피웠다.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어 있었다.

/ 박창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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