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각병정 이야기
무명용사(Unknown Soldier). 국적 영국. 유품이 발견되지 않아 소속부대, 전사기록 알 수 없음.
한스(HANS). 국적 룩셈부르크. 육군보병. 1951년 7월1일 참전하여 같은해 10월11일 학당리 전투에서 전사.
데이비스(DAVIS). 국적 호주. RAR 3대대 사병. 1950년 9월27일 부산에 상륙, 제27여단에 배속. 1950년 10월9일 38선을 넘어 북진작전 중 전사.
존(JOHN). 국적 미국. 미3사단 포병대 관측장교. 1952년 11월부터 1953년 2월까지 한국군과 합동으로 철원전투에서 관측장교로 활약하다 전사.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각국 병사들의 비망록이다. 적어둬야 할 기록은 수도 없이 많다. 한국전에 참전했다 희생된 유엔군 전사자는 3만7천8백97명. 이들 중에는 ‘비망(備忘)’할 아무것도 없는 ‘무명(無名)’도 있다.
이들의 사연은 사이버 공간에 애니메이션으로 되살아나 있다. ‘목각병정 이야기’가 그것. 지난해 6월 부산 남구청은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아 각국의 참전용사들을 캐릭터로 만든 ‘평화상품’을 내놓았다. 이 애니메이션은 유엔공원이 전쟁 희생자들의 단순한 묘지가 아니라 세계인의 평화공원임을 역설하고 있다.
☆평화와 자유
지난 19일 오후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공원.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를 맞았는데도 공원은 조용한 겨울잠에 빠져 있다.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 그 의미는 무엇일까.
14만4천1백47㎡(4만3천6백4평)의 넓직한 묘역엔 세계 각국에서 기증한 8천5백여그루의 수목들이 바깥의 도시소음을 막아주고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활엽수와 잔디는 그 무엇을 기다리는지 바짝 마른 채 봄을 기다리고 있다. 손질이 잘된 상록수들은 여전히 푸른 빛이다. 봄빛이 터지면 상록수들은 한층 물이 오를 것이다.
유엔공원이 울부짖는 외침은 평화와 자유. 이 성역에 깃든 2천3백명의 영혼들이 건네는 무언의 메시지가 엄숙하게 다가온다. 한국전쟁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전쟁은 지구촌 곳곳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거두지 않고 있기 때문.
한반도는 여전히 ‘휴전상태’이고, 한국전쟁의 상대편 당사자에게 던져진 ‘악의 축’이란 발언은 또다른 긴장을 몰아오고 있다.
묘역의 비석들은 ‘평화와 자유는 과연 누구 편인가’하고 묻고 있지만 대답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평화와 자유의 염원을 담았다는 돌(기념석)들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유엔공원 내 기념관에는 한국전쟁에 참전, 이제 할아버지가 된 각국 역전의 용사들이 기증한 11개의 돌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되풀이돼선 안된다는 염원을 담은 돌이다. 한 줌에 들어올만한 크기의 돌들이지만 그 돌의 무게는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만큼이나 무겁다.
돌은 기념관에서만 무게를 다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와 자유의 짐은 다음 세대가 풀어야할 숙제로 남겨져 있다.
유엔공원 옆 1만5천4백㎡ 부지의 조각공원. 이곳에는 예술로 승화한 돌들이 전시돼 있다. 유엔공원 동문에서 막바로 통하는 이곳엔 평화 자유 통일의 염원을 담은 23개국 29명의 조각가들이 기증한 작품들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해 10월 한국전쟁 5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이곳의 조각품들도 ‘평화와 자유’의 의미를 묻고 있다.
☆우리에게 지워진 짐
애니메이션 ‘목각병정 이야기’는 상극(相剋)을 상생(相生)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전쟁에서 희생된 ‘목각병정’들이 영혼의 안식처인 바다에 띄워지는 마지막 장면이 그것을 말해준다.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 유엔공원이 부산의 끝, 남구 대연동에 자리잡게된 것은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지금의 묘역 앞 LG메트로시티 아파트가 들어선 옛 동국제강 부지는 전쟁 당시 배가 접안할 수 있는 곳으로, 전사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기에 적당한 위치였다.
유엔공원은 치외법권 지역이다. 1951년 1월 유엔군 사령부에 의해 설치돼 개성 인천 대전 대구 밀양 마산 등지에 흩어져 있던 유해를 모셔 한때 1만1천기에 이르렀다. 1959년 11월 유엔과 한국간에 협정을 체결, 이듬해인 1960년 3월 유엔이 묘지의 관리를 맡았으며 정부는 묘역이 위치한 토지를 유엔에 기증했다. 그 후 1974년 2월부터 우리나라를 비롯, 묘역에 유해를 안치한 11개국으로 구성된 재한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가 관리 주체가 됐다.
지구촌에서 유일한 유엔공원이 한국, 그것도 부산에 있다는 것은 부산의 든든한 자부심이다. 동시에 짐일 수도 있다. 그 짐은 평화와 자유에 대한 무언의 가르침이다. / 정상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