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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산 안희제 선생의 장손인 안경하(67)씨가 부산 중구 동광동의 백산기념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안 선생은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삶은 여전히 어렵다. 우리 가족은 독립유공자 후손들 가운데 그나마 좀 나은 경우"라고 말했다. 곽재훈기자 kwakjh@kookje.co.kr |
'천석꾼'의 후손도 '가난의 덫'에 걸려 고통받고 있었다. 아무리 부자라도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공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부산을 대표하는 독립지사 백산(白山) 안희제(1885~1943) 선생의 후손도 마찬가지였다.
경남 의령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백산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인 백산상회를 설립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 경제인이었다.
또 항일신문인 중외일보를 인수해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구명학교·의신학교·창남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1943년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아 사망하기 직전까지 만주에 독립운동기지인 '발해농장'을 창건했다.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에 사용했다.
이 때문에 백산 선생의 후손들에게 남겨진 재산은 고향에 남은 집과 약간의 전답 뿐이었다.
특히 장남 안상록(1905~1982) 선생은 해방후 좌익으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승만 정권이 김구 선생이나 몽양 여운형 선생과 각별했던 백산 선생의 유족을 눈엣가시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안상록 선생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1948년 김구 선생을 수행해 평양에서 열린 남북회담에 참가했다.
백산 선생의 장손이자 안상록 선생의 장자인 안경하(67·부산 해운대구 우동)씨는 "이승만 정권의 핍박으로 인해 부친이 사회활동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연좌제에 걸린 것"이라고 말했다.
안상록 선생은 자녀 2남5녀 가운데 장자인 경하씨만 대학을 보냈다. 넉넉치 못한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안씨는 "1958년 한국해양대에서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나머지 동생들은 고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한국해양대 졸업후 15년간 배를 탄 안경하씨는 1978년 컨테이너부두운영공사에 입사해 다소나마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동생들도 '배를 곯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1990년대에는 자식들 공부를 시킬 만한 생활수준이 됐다.
안씨는 "우리 가족은 그나마 독립유공자 후손들 가운데 형편이 괜찮은 경우에 해당한다"며 "일부 유공자 후손들은 학교 등록금이 없어 문맹자로 지내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