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서모(56·부산 동래구 수안동) 씨는 지난 4월 29일 길거리에서 쓰러진 뒤 극심한 고통 속에 의사를 찾아 2시간이 넘게 온 시내를 헤매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그에게 갑자기 옆구리 통증이 덮친 것은 이날 오후 6시께, 금정구 노포동 지하철역 부근에서였다. 행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구급차에 실려 인근 동래백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전문의가 없었다. 발길을 돌려 7㎞ 가량 떨어진 대동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역시 전문의 부재로 진료를 받지 못했다. 다시 50여 분간 구급차를 타고 오후 8시10분께 동아대병원에 도착해서야 가까스로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이송 도중 발작을 일으켜 온 몸이 뒤틀리고 정신마저 혼미했다.
119 구급대의 지원을 받고서도 의료진을 못찾아 길거리를 헤매는 응급환자들이 적지 않다. 하루 평균 8명 꼴이다. 본지 취재팀이 부산소방본부 산하 53개 소방파출소의 지난 4월 한달치 '119 구급일지'를 분석한 결과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응급환자 후송의 중추인 119구급대가 '1339(응급의료정보센터)'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 서 씨의 경우에도 당시 119구급대가 1339 정보를 이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전문 구급대원이 아닌 환자나 보호자가 병원을 선택하고 있는 현실과 병원측의 진료 기피 현상, 허술한 응급의료 준비 등은 응급의료시스템의 후진성을 말해주는 단면들이다.
▲1339 이용 저조=중앙응급의료센터에 따르면, 지난 4월 부산지역의 1339 이용 실적 4936건 가운데 119구급대의 비중은 4.9%(244건)였다. 일반인이 65.7%(3244건)로 가장 많았고, 의료기관이 26.8%(1324건)로 그 다음이었다.
전문가들은 119 구급대가 1339를 제대로 활용한다면 '의사를 찾아 헤매는' 식의 부작용은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부산대병원 조석주(응급의학) 교수는 "응급환자가 길거리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제때 진료를 받기 위해선 응급의료정보센터를 통한 의료진과의 실시간 연락이 필수"라며 "1339를 중심으로 한 응급의료 체계가 굴러가야 한다"고 말했다.
▲환자 및 보호자들의 고집=지난 4월 8일, 응급환자 조모(53·부산 사상구 덕포동) 씨 가족의 신고를 받고 긴급 출동한 119 구급대원들은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조씨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추락, 위중한 상태인데도 가족들이 가까운 병원으로 후송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던 것. 구급대원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차, 2차로 들른 중앙병원과 삼선병원측이 연달아 "혈압이 자꾸 떨어져 위험하니 우리로선 치료가 어렵다"며 큰 병원에 갈 것을 주문, 백병원에 가서야 겨우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응급환자 이송 병원이 대부분 이처럼 환자나 보호자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부산소방본부의 지난 4월 '구급일지'에 기록된 6461건 가운데 78.8%(5094건)가 그런 경우였다. 지난해 8월 구급대원이 의사와 상의해 이송병원을 선택하도록 '구조대 및 구급대 편성·운영에 관한 규칙'이 개정됐지만 현장에서 효과가 없는 셈이다.
▲진료기피도 문제=지난 4월24일 오후, 수정소방파출소의 한 구급대원은 폐렴과 전신 쇠약으로 신고된 구모(44) 씨를 후송하고 귀소하기까지 무려 3시간을 보냈다. 처음에 D병원으로 갔으나 병원 측은 "격리 입원이 필요한 환자라서 보호자가 없으면 안된다"며 수용을 거부했다. 경찰에 신원 확인을 요청한 끝에 연결된 보호자도 "그런 사람 모른다"고 외면했다. 간신히 행려환자로 처리해 부산시립의료원에 입원시켰지만 행정절차 등을 이행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병원 측은 때로 교묘한 진료기피 핑계를 대기도 해 구급대원들의 원망을 사고 있다. S소방파출소 구급대는 같은 달 20일 심한 호흡 곤란 증세를 호소하는 김모(34)씨를 S, C병원에 잇따라 후송했다가 진료를 사실상 거부당했다. 보호자가 없어 치료비 받기가 곤란한 상황임을 알자 병원측은 표면적으론 "우리 병원 의술로는 힘들다"고 둘러댔다는 것. 구급대원들은 "해당 진료과목이 있다는 걸 알고 갔는데도 병원 측의 태도가 워낙 완강해 몇 차례 따지다 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다"며 씁쓰레했다.
▲야간 응급의료 구멍=같은 달 18일 밤 10시30분께 복통 환자를 J병원 응급실에 후송했던 북구의 한 소방파출소 구급대원은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 "혈액검사를 해야 하는데 밤에는 임상병리사를 호출할 수 없어 진료를 못한다는 겁니다. 나중에 따졌더니 근무 규칙을 잘못 알았다는 거예요." 그는 아파 죽겠다는 환자를 다시 구급차에 태우고 25분 걸려 다른 병원에 가야 했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부산에서 밤에 맹장수술이 가능한 병원이 몇 곳 안된다. 외과, 마취과 의사들이 밤에 안나오려 하기 때문"이라며 허술한 응급의료 실상을 꼬집기도 했다.
# 1339(응급의료정보센터)는 어떤 곳 = 응급환자의 효율적인 치료와 이송을 위해 보건복지부가 각 권역 응급의료센터에 위탁 운영하는 기관. 환자의 상태에 따라 의료기관을 신속히 안내, 적절한 치료를 받도록 하고 있으며 24시간 운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