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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극 세종과학기지에 초속 20m 를 넘나드는 블리자드(폭설풍)가 몰아치자 기지의 한 대원이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박수현 기자 |
지난 15일 새벽에 시작된 블리자드(Blizzard)가 밤 늦은 시간까지 계속됐다.
꼬박 하루 내내 눈보라가 몰아친 것이다. 블리자드가 몰아치는 날에는 숙소에서 30m쯤 떨어진 본관까지 가는 데도 겹겹이 옷을 껴입어야 한다. 어느 틈엔가 몸 속으로 스며든 눈가루가 체온에 녹으면서 몸이 젖어 버리기 때문이다. 극지방에서 10분간의 평균 풍속이 초속 14m 이상에 이르러 시계를 150m 이하로 떨어뜨리는 눈보라를 블리자드라고 한다. 이날 하루 종일 몰아친 블리자드는 순간 최고 풍속이 29.1m에 시계는 60m 정도였다.
블리자드 예보가 떨어지면 세종과학기지 대원들은 근무 위치에서 비상 대기한다. 기지의 주요 건물들은 정확하게 동서 방향으로 세워져 있어 블리자드를 몰고 오는 남동풍이나 북동풍의 영향을 덜 받는 편이다. 그러나 건물에 작은 틈새라도 있으면 눈가루가 밀려 들어 이내 수북이 쌓인다. 이 눈이 녹으면서 연구기자재나 발전기 등의 설비가 침수되면 기지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원들의 기지 밖 활동도 금지된다. 눈보라 속에선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안전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장성(長城)기지 대원 한 사람이 블리자드가 부는 날 기지를 나섰다가 발을 헛디뎌 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늘 다니는 익숙한 길이라도 블리자드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면 목표 지점을 찾아 가기가 힘들다.
심한 경우 한자리를 빙빙 맴도는 환상방황을 하게 된다. 2005년 개봉된 임필성 감독, 송강호 주연의 영화 '남극일기'를 본 독자라면 남극점 정복에 나선 대원들이 블리자드 속에서 며칠 동안 강행군을 하다가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 오고는 맥이 풀려 주저앉고 마는 마지막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블리자드가 더욱 위험한 것은 길을 잃고 방황을 하다가 저체온증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체온이 35도 이하로 떨어지는 저체온증은 적절한 조치없이 오랫동안 방치되면 의식불명에 이어 사망으로 연결된다.
문득 1911~1912년 남극점 정복에 나섰던 영국 스콧탐험대의 로렌스 오츠의 명언이 떠올랐다. 그는 동상에 걸린 자신의 발 때문에 일행의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는 것을 알고 탐험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고 판단, 블리자드가 몰아치는 텐트 밖으로 스스로 걸어 나갔다.
스콧의 일기는 로렌스 오츠의 마지막 말을 기록하고 있다."잠시 밖으로 나갔다 오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류 최초로 남극을 정복한 성공한 탐험가 아문센보다는 전원 사망하며 처참하게 실패한 스콧탐험대에 더 매료되는 것은 블리자드 속으로 스스로 사라져 동료를 구하려 했던 로렌스 오츠 같은 대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후원 : 부산과학기술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