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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6일 세종과학기지 선착장에서 기지대원들이 체험단을 환송하고 있다. 박수현 기자 |
"서로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다. 무언가 도울 일을 찾아야만 만족할 정도다."
남극에 상주하는 각 나라 기지 대원들 간의 분위기를 묻는 질문에 3차례 월동한 경험이 있는 극지연구소 정호성 박사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한다. 킹조지 섬에는 설립 순으로 아르헨티나, 러시아, 칠레, 폴란드, 브라질, 우루과이, 중국, 한국 등 8개의 기지가 있다. 각국 대원들은 남극에서 월동한다는 동질감으로 쉽게 친해진다.
26일에는 하루를 묵을 계획으로 중국 장성기지(Great Wall Station)를 방문했었다. 27일 칠레 프레이기지에서 군 수송기 편으로 남극을 빠져나올 예정이었으므로 공항 인근에 위치한 장성기지에서 비행기를 기다린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27~29일 폭설을 동반한 기상 악화로 우리를 데리러 와야 할 비행기가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이륙하지 못해 장성기지 생활이 나흘로 연장돼 버렸다.
12명이 상주하는 중국기지에 10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들이닥쳐 민폐(?)가 막심했다. 잠자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신들도 부족한 부식을 나눠 먹어야 하는 상황이니 우리 일행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3일째 되는 날에는 인원을 반으로 나눠 식사는 인근의 러시아기지에서 하고 잠은 중국기지로 돌아와 자기로 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중국기지에서는 이벤트를 열어 우리 일행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위로해주었다.
러시아 기지 방문 때는 전통을 자랑하는 명물인 120도 고온 사우나가 전격 가동되었다. 연료가 부족한 러시아 기지에서 사우나를 가동하는 것은 큰 행사 중 하나라고 한다. 사우나에서 땀을 빼고 나자 러시아인들이 싱긋 웃으며 바깥 문을 열어준다. 한발 나서니 눈밭에 판 웅덩이에는 살얼음이 덮여 있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일까. 얼음물 속이라 차가워야 할 텐데 차가움을 넘어선 수온으로 인해 피부에는 불에 덴 듯한 따가움만이 전해졌다.
체류 이틀째 저녁. 중국기지에서는 게양대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국제탁구대회'가 열렸다. 기자는 얼떨결에 대표선수로 나서 중국기지 랭킹 1위인 기지대장을 이기는 바람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중국대원들이 너도나도 라켓을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 통에 오후 8시에 시작한 탁구가 자정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중국기지대장은 지난 8월 열린 '남극올림픽' 탁구 종목에서 중국대표로 출전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월동하는 각국 기지대원들은 한겨울인 8월께 실내체육관이 있는 칠레 기지에 모여 '남극 올림픽'이라 불리는 친선 체육행사를 열고 있다. 탁구를 비롯 실내경기가 가능한 배구, 농구, 실내축구 등 4개 종목이 열리는데 대개 공군기지를 운영하며 가장 많은 대원을 상주시키는 칠레가 우승한다고 한다.
체류 나흘째. 세종과학기지로부터 김치, 고추장, 라면 등 부식을 실은 배가 도착했다. 장기 체류에 대비한 조치였다. 잘못하면 남극에 상당기간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곳 사람들에게 정설로 통하는 "남극에는 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간다고 장담하지 말라"라는 이야기가 새삼 떠올랐다. "우리와 함께 기지에서 살자"는 중국대원의 농담이 더 이상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날 오후 수송기가 푼타아레나스를 이륙했다는 무전이 왔다.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며 공항으로 달려갔지만 비행기가 안전하게 착륙할 때까지 내심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오후 6시께 낮게 깔린 구름을 뚫고 수송기가 나타났다. 첫 번째 선회비행을 마치고 활주로에 착륙하는 수송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남극을 빠져 나오는 데만 신경을 쓰느라 감상에 빠져들 여유를 잃었는데 비행기가 이륙한 후 창을 통해 눈부신 설원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서야 남극에 대한 뒤늦은 미련이 남기 시작했다. 남극에 두고 온 사람들의 따뜻한 정과 풋풋한 사람 냄새가 만년설의 눈밭에 아로새겨진 발자국만큼 기억속에 선명하게 남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