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보

김상옥

지난 2일 '부산시조가 뛴다' 시리즈 첫 기사가 나간 뒤 적지 않은 부산의 시조인들이 전화와 문자메시지, 이메일을 주셨다. 대부분 시조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답장'이었다. 그 가운데 정희경 씨가 보내온 메일이 있었다. 정 씨는 '시조를 아끼고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등단한 시조인은 아니고, 애호가라는 것이다. 정 씨는 편지에서 기자에게 '혹 시조를 써본 적이 있는지, 써볼 의향은 없는지' 물어왔다. 상냥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조금 곤혹스러웠다. 생각해보니, 기자는 시조를 써본 적이 없고, '써봐야지' 하고 마음먹은 기억도 없었던 것이다.

정 씨는 '강동 어머니 시조사랑'이라는 모임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6월 부산 해운대 강동초등교 어머니들이 부산시교육청의 평생교육 시책과 교장선생님의 권유에 호응해 만든 모임인데 자주 모여 시조를 공부하고 한 달에 두 번 회보도 낸다고 한다. 그동안 낸 회보가 35호에 이른다니 탄력이 제대로 붙은 것 같다. 현재 16명인 어머니 회원들은 아이들의 재량수업을 지원하기도 하고, 스스로 백일장에 나가 상을 타기도 했단다.

성파스님

이영도

찾아보면 더 있을 것이 분명한 이런 풀뿌리형 시조모임은 부산 시조가 오늘에 맺은 열매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누가 언제 씨를 뿌려놨던 것일까. 씨를 뿌려놓지 않고서야 열매가 맺힐 리가 없지 않은가.

부산시조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었다. 한국시조는 최초의 개화시조는 1906년 대구여사(大丘女史)라는 필명으로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혈죽가'를 최초로 치고 있다. 부산의 시조시인이자 시조연구가 백승수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월하 이태극 선생은 1904~1919년을 시조의 부흥 전기, 1920~1926년을 부흥 후기, 1927~1932년을 발전 전기(또는 활동 전기), 1932~1940년을 발전 후기(활동 후기), 1941~1945년을 수난기, 1945~1960년을 소생기(소생 전기와 소생 후기로 나뉨), 1961년 이후를 중흥기로 나눴다.

이 분류에 따르면 부산에서 태어났거나, 부산에서 일정 기간 이상 살며 시조활동을 했던 '부산 현대시조의 선구자들'로 '활동 전기'에 활약한 황산 고두동(1903~1994)이 있으며 이후 '활동 후기'의 시조인으로 하보 장응두(1913~1970), 초정 김상옥(1920~2004), '소생 전기'의 정운 이영도(1916~1976), '소생 후기'의 소정 서정봉(1905~1980)이 있다. 한결같이 우리 문학사와 시조사에 우뚝한 거목들이다.

경북 청도군 화양읍 소라리에 조성된 시조공원에 설치된 이영도 시비. 그의 대표작 '달무리'가 새겨져 있다. 이영도의 시비는 부산 금강공원에도 세워져 있다.

이태극의 분류법을 적용하면 1960년까지가 소생 후기에 해당하며 1961년 이후부터 중흥기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1960년대는 우리 시조 부흥기의 여명에 해당한다. 이때 등단하는 시조시인이 부산일보 사장을 지낸 김상훈 시조시인과 부산대 교수로 있는 임종찬 시조시인이다. 김상훈 시인은 1959년 전국시조백일장과 196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임 교수는 196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왔다. 이들은 1960년대 부산에서 활동했던 시조시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김상훈 시인은 '부산시조' 2005년 가을호에 이영도와 그의 오빠 이호우의 시비를 앞장서 건립한 사연을 회고하고 있으며, 임 교수 또한 젊은 시절 장하보 이영도 시인 등과 함께했던 일들에 대한 증언이 많다.

이는 '부산 현대시조의 선구자들' 맥이 후배 시인들에게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1970년대 김종 정해송 전일희 김용태 황다연 공재동, 1980년대 강영환 전치탁 주강식 백승수 이성호 양원식 박달수 박옥위 박필상 등으로 등단 대열이 계속 연결되고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부산 시조시단은 저변을 넓히고 허리를 탄탄하게 구축해간다.

시조 전승과 부흥을 보여주는 현장들. 1998년 11월 28일 성파 시조 문학상 시상식

그러던 중 1974년, 부산의 시조계가 '최고의 중흥 계기'로 꼽는 커다란 일이 일어난다. 당시 홍순철 부산시교육감과 시조인 살매 김태홍 선생이 '우리 고유 시가 시조의 부흥'을 선언하면서 학생과 교사를 대상으로 시조짓기 운동을 크게 펼친 것이다. "그땐 대단했습니다. 너도나도 시조를 익히고 썼지요. 시조를 잘 쓰는 것이 자랑이 됐고 관심도 아주 높아졌어요. 한 3년 동안 굉장했어요."(전치탁 전 부산시조시인협회장) 그런데 이 시조 르네상스의 열기는 갑자기 꺼지고 만다. 시조짓기대회에서 입선하는 교사들에게 가산점을 준 것이 화근이었다. "시조를 잘 쓰면 고과에 반영되고 승진 기회가 넓어진다고 하니까 잘 쓰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작품을 받아 내는 사람들이 속출했던 거지요." 이런 행태가 문제가 되자 4년 만에 제도 자체가 없어지고 살매 김태홍과 홍순철 교육감이 촉발한 시조부흥의 불꽃은 꺼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그 짧았던 기간에 씨가 뿌려졌던 것이다. 당시 교사·학생 시조쓰기 경연이 계기가 되어 '돌림그네'라는 작품집을 펴내는 등 시조의 맛을 알게 된 사람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특히 각 기별 장원을 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부산시조문학회가 결성되고 '볍씨'라는 동인지도 창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언저리인 1983년 성파스님이 성파시조문학상을 제정하고 백일장 등이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1987년에는 부산여류시조문학회가 발족한다.

시조 전승과 부흥을 보여주는 현장들. 10년이 흘러 2008년 6월 14일 부산시조시인협회가 연 하계 세미나.

그렇게 조금씩 저변을 넓히고 역량을 쌓아가던 부산 시조계는 1989년 맞이한다. 그 직전 해인 1988년 부산의 시조시인들은 자신들이 주축이 되어 부산 경남 대구 경북 시조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영남시조인협회 결성을 주도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백승수 박사는 "1989년 이전까지 부산에는 볍씨 동인 말고도 동백문학회나 나래 동인에 가입돼 있던 시조시인, 개인적으로 활동하던 시조시인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1989년 부산시조시인협회가 발족하면서 부산의 시조인들이 한 단체에 통합된다. 1989년은 부산 시조계에 기념비적인 해다"라고 말했다. 부산시조시인협회는 내처 그해 7월 '부산시조' 창간호를 낸다. 매체까지 갖춘 것이다.

'부산시조' 창간호에 편집위원으로 참가했던 정해송 부산시조시인협회장은 "그 과정에서 특히 김상훈 초대 부산시조시인협회장 등의 공로가 컸다"고 회상했다. 초대 사무국장을 지낸 박달수 전 협회장도 "부산의 시조시인을 통합하고, 단체를 꾸리고, 잡지를 내느라 참 애를 많이 썼다"고 떠올렸다.

부산시조의 약동을 예고했던 '부산시조' 창간호(1989년).

2005년 '시조 700년 겨레시 700년'이라는 행사를 서울보다 먼저 기획해 전국 시조 명소를 회원들과 함께 2박 3일 순례하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시조교실을 운영하고, 부산교육청과 협의해 교사시조연수를 진행하는 등 조직력이 없으면 좀체 펼칠 수 없는 활동을 이어나간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다른 문학장르에 비해 대중의 관심도 덜하고, 회원 수도 적은 시조인들의 모임이 의식적으로 '겨레의 시가'를 세우고 널리 펴기 위해 활동해왔다는 것은 지역문화 관점에서 관심을 기울일 만한 현상이다. 거기에 후진 시인도 꾸준히 배출되고 있다. 정 회장은 "하지만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여전히 많다"고 말했다. "교사시조연수에는 신청자가 적어 올해는 건너뛰었습니다. 교과서에 실리는 시조의 편수도 줄어들고 젊은 층은 여전히 관심을 잘 주지를 않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수백 종의 동인지가 나오고 미국 교과서에도 작품이 수록돼 있으며 유럽과 미주에 수많은 동호인모임이 있다는 일본 하이쿠에 비하면 아직 한국의, 부산의 시조는 힘겨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기만 할까.

앞서 소개한 정희경 씨는 편지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 동안의 결과물을 모아 책도 펴냅니다. 12월 15일쯤 책('강동문학' 창간호)도 나올 예정입니다. …저희들은 평범한 국민 모두가 시조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희 모임의 회원들은 거의 처음 시조를 접한 분들인데 지금은 모두들 잘 쓰고 있습니다. 물론 작품의 격을 논한다면 기성 시인들에 비길 바가 못되지만 그 열정만은 대단합니다.시조의 미래는 이런 곳에 있지 않을까요?' 이번 시리즈는 최근 활력을 보여주고 있는 부산 시조계의 비결이 뭔지 알아보기 위해 시작한 '부산 시조의 뿌리 더듬기' 취재였다. 그 결과 부산 시조의 뿌리는 깊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릴세, 꽃 좋고 열매 많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