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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문학기행 <87> 정호승 시인과 함께 한 영주

부러지고, 외로워하고, 그렇게 사랑을 하고… 그래서 사람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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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로 시작하는 시 '그리운 부석사'는 부석사를 수많은 독자의 가슴에 새겨넣었다. 이 시를 쓴 정호승 시인이 지난 21일 부석사를 다시 찾았다.
"'문틈으로 부처님을 바라보는 것과 직접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몸을 엎드려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고 쓰신 적이 있다"고 묻자 정호승 시인은 "함께 안으로 들어가볼까요?" 하고 나직하게 말하며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부석사 무량수전 안으로 앞장서 들어섰다. 많은 절을 다녔지만 부처님 앞에서 절을 올린 적이 한 번도 없던 기자는 제사상 앞에서 법도를 몰라 불안하게 허둥대는 이방인의 심정이었다. 그래서 흘끔흘끔 곁눈질하며 정호승 시인을 따라했다. 일배, 이배, 삼배.

삼배를 하고 나자, 더 하고 싶어졌다. 오묘한 체험이었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 이마가 땅에 닿도록 몸을 낮춰 절을 하자 어느 순간엔가 '부탁드립니다…잘못했습니다'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절을 마치고 꼿꼿하게 몸을 일으키자 그런 생각이 슬며시 사라졌다. 다시 절을 하자 마음 속은 또 '잘못했습니다…부탁드립니다'가 됐다. '이래서 삼천배를 하는구나, 이래서 삼보일배를 하고 난 사람들 표정에 빛이 어리는구나'. 비로소 절을 왜 절이라 하는지 조금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정호승 시인에게 이런 심경을 말하자 그는 편안하게 웃어주었다. 무더위의 '무' 자가 물(水)에서 왔다는 설명이 있다. 물 기운이 많아서 습도가 높고 동시에 호되게 더운 게 무더위다. 지난 21일 문학기행 일행이 정호승 시인을 만나기 위해 부석사가 있는 경북 영주로 찾아갔을 때 우리를 반겨준 것이 이 무더위였다. 그런 무더위속에서도 이번 '정호승 시인과 함께 하는 영주문학기행'에는 독자들이 70명 넘게 참가했다. 보통 땐 관광버스 한 대면 충분한데 이날은 두 대가 필요했을 정도로 정호승 시인에 대한 부산 독자들의 호응은 높았다.

소수서원에서 독자들이 정호승 시인의 문학이야기를 듣고 있다.
"고등학교 때였어요. 선생님이 칠판에 정호승 시인의 시를 적어주셨어요. 그때 완전히 빠져든 거죠. 대학 때 다른 학교에 정호승 선생님이 초청강연을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간 적도 있어요. 선생님의 시요? 처음엔 어렵지 않아서 좋았어요. 그러면서도 강렬하게 독자에게 말을 걸어주는 시였으니까요. 그런데 나이가 조금 더 든 지금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 거기에 굉장한 삶의 깊이가 있었던 것이구나 하고 새삼 다시 깨닫게 되요." 국문학을 전공했고 학원강사로 일하고 있다는 참가자 천수진(25) 씨는 다시 한번 "만사를 제쳐놓고" 이번 문학기행에 쫓아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국어교사를 꿈꾼다는 이현주(21) 씨는 "정호승 시인을 꼭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고 했다. 방과후강사 정명순(40) 씨는 "남편과 딸이 함께 왔는데 시에 곡을 붙여 만든 시노래 가운데 정호승 시인의 시노래가 참 좋다"고 했다. 정 씨는 이날 시낭송 순서에서 정호승 시인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불러 박수를 받았다. 부부 참가자, 가족 일행 그리고 혼자서 온 장년까지 유난히 구성이 다양한 문학기행이었다.

여정의 시작은 부석사여야만 했다. 절을 개축하고 올 가을 문을 열 성보박물관을 짓느라 부석사의 한 켠은 분주한 모습이었지만 그 유서깊은 정취를 느끼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40대 초에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20여 년 전이죠. 그때 부석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가을이었는데 노란 은행잎이 길 가득 깔려있고 고색이 창연했던 당간지주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렸다는 상사석, 주변의 사과밭과 그때 만난 사람들…. 모두 아주 인상 깊어서 문득 든 생각이 우리 인생이란 누구나 자신의 마음 속에 자신만의 절을 하나 짓고 그게 부서지고 또 짓고 부수는 그런 일 아닐까 하는 것이었지요."

그때 그는 자문하기를 '그럼 네가 네 마음 속에 짓고자 하는 절은 뭐냐?'는 것이었단다. 왠지 참담한 마음이 되었고, 가톨릭신자인 그는 무량수전 안으로 들어섰다고 한다. "아미타불이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고 죄 많은 나는 겁이 났어요. 처음으로 부처님께 절을 했는데 눈물이 흐르대요. 많이. 그러고 나니 누군가에게 절을 할 수 있다는, 그럴 대상이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습니다." 그런 정화의 체험은 그의 발길이 다시 부석사로 향하게 했고 정호승 시에서 건너뛸 수 없는 작품으로 이슬처럼 맺혔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로 시작하는 '그리운 부석사'(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수록)다.

그는 독자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했다.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듬듯 대했다. 일행인 독서지도사 박영희 씨가 "직업상 문학과 관련된 분들을 만나거나 행사를 접하는 일이 많은데 이렇게 마음 속 깊이 들어오시는 분도 참 드물었던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부석사를 나와 소수서원과 전통문화체험 공간 선비촌을 시인과 일행은 함께 거닐었다. 소수서원의 청량한 개울가에서 시인의 문학강연이 이어졌고 여기서도 그는 속엣 것을 독자에게 다 보여주는 기세였다.

시인은 그의 시 '부러짐에 대하여'를 들려줬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나도 부러지려면 작고 가늘게 부러져야 겠구나.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부러져야겠구나. 그래야 다른 이가 나를 물고 가서 집 짓는 데 쓰지 않겠나. 요즘은 얻어맞고 부러져도 그게 자연스러워요. 결국 내가 부러지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수서원 개울가 그늘에 앉아 그는 독자들에게 슬쩍 되묻는다. "부러짐, 장미의 가시, 밝음 뒤의 그늘…. 지금 우리처럼 사람은 그늘에서 쉬잖아요. 밝음만 있고 그늘이 없으면 우린 어디서 쉴 수 있을까요. '장미처럼 예쁜 꽃에 가시가 있다니!'가 아니라 '가시투성이 나무에 장미처럼 예쁜 꽃이 피었네!'가 삶의 진실에 더 가깝죠. 부러져야 사랑에 쓰일 수 있고 '외로워서 미치겠다 '가 아니라 외로우니까 사람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 속에 나만의 부석사를 지을 수도 있고 더 잘 사랑할 수 있을 것이겠죠. 여러분 가슴 속의 부석사는 무엇인가요?"

개울가 강연이 끝나자 일행 중 소설가 고금란 씨가 나서 수줍게 혼자 익힌 오카리나를 연주해 시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흙으로 빚은 오카리나 소리가 소수서원의 개울가를 넘어 멀리 퍼졌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중략)
      
- 정호승 시인의 '그리운 부석사'


■ 영주에서 함께한 권석창 시인

- "보-ㅁ 모-니껴?" 사투리의 정겨운 매력

자신의 시를 들려주고 있는 권석창 시인(왼쪽).
경북 영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권석창 시인은 현재 경북작가회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경북작가회의 사무국장인 박승민 시인과 함께 영주를 찾은 부산의 일행을 곳곳의 명소로 안내하면서 이 문학기행이 짧은 일정 속에서도 역사기행이자 문화기행까지 겸할 수 있게 환대를 아끼지 않았다. '선비의 고장' 영주 시인들은 고향 사랑이 은근하면서도 끈끈했다. 특히 권석창 시인은 이날 지역 사투리를 부산 독자들에게 가르쳐주면서 시를 통해 자연스럽게 지역 문학의 면모를 과시해 큰 박수를 받았다. 그가 자신의 시 '보-ㅁ 모-니껴?'를 들려줬다.

'보면 모릅니까? 의 안동 말은/보-ㅁ 모-니껴?/보와 모를 강하게 발음한다./아는 이는 알고 모르는 이는 모른다, 의 안동 말은/아-니는 아-고 모-니는 모-ㄴ다./아와 모를 강하게 발음한다./ 따라해 볼래요?/보-ㅁ 모-니껴?/아-니는 아-고 모-니는 모-ㄴ다./(중략)/농사철 땀 흘리며 일하는데/양복 입은 면장님이 찾아와서/올해 농사는 어떻습니까? 하면/보-ㅁ 모-니껴? 하고/선거철 높으신 분이 재래시장 찾아와서/요즘 장사 잘 됩니까? 해도/보-ㅁ 모-니껴? 한다./지을수록 밑지는 농사짓는다고 업신여김 당하고/ 애면글면 해도 펴지지 않는 살림살이/우리네 기막힌 사정을/아-니는 아-고 모-니는 모-ㄴ다,/는 것이다'.

신문학기행 참가 문의=부산문화연구회 (051)441-0485 동보서적 803-8000 www.문학기행.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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