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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문학기행 <90> 성석제와 상주

이야기꾼 성석제를 품어낸 아름답고 풍요로운 상주…중독성 있는, 그 힘의 원천

곶감 가공·자전거 보유 1위 부농 지역…경천대~남장사 따라 고향자랑 굽이굽이

유년시절 무협지부터 소설까지 다독…연암 박지원을 만나 문학의 눈 뜬 곳

작품 절반 이상 직·간접 반영돼…'명작의 고향'이라 농담 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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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성석제 씨가 상주의 명소인 도남서원에서 문학기행 일행들에게 "내 고향 상주와 나의 문학"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지난 18일 밤 9시20분께, '소설가 성석제와 함께 하는 경북 상주 문학기행'을 마친 관광버스가 출발지였던 부산 연제구 거제동 국제신문사 앞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문학기행 참가자들은 하나 둘 집으로 가는 지하철과 택시에 올랐다. 웃는 얼굴들이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채 끝까지 읽지 못한 성석제의 최근 소설집 '지금 행복해'(창비)를 다시 펼쳐 들었다. 수록작 '낚다 섞다 낚이다 엮이다' 중 주인공인 '내'가 그만 똥통에 빠졌다가 여러 단계의 '불행 중 다행'을 겪으며 소동을 벌이는 대목이었다. 낄낄낄낄낄…. 지하철 승객들이 보거나 말거나 삑삑 새나오는 웃음을 간수하지 못한 채 책에 코를 박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생각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 분)가 했던 그 말이 순간 떠올랐다. 순전히 글로 사람을 쥐었다가 폈다가, 웃겼다가 번쩍 삶을 생각케 하는 작가 성석제, '누구냐?너는'.

사실, 성석제 작가와 함께 오지 못했다 하더라도 큰 후회는 없을 뻔했다. 그만큼 가을 햇살이 만발한 경북 상주는 '왜 진작 여길 와보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이 들 만큼 풍정이 좋았고 여정도 풍성했다. 상주박물관 앞에서 부산의 문학기행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작가가 우리를 처음 안내해 준 곳은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의 경천대(敬天臺)였다. 전망대에 오르자 풍광이 가히 아름다웠다. 낙동강 물굽이가 멋들어지게 돌아가고 있었다. "저기 누런 들판을 옛날에 사벌주라 했습니다. 상주는 지금도 쌀이 많이 납니다. 원래 김해보다 쌀 생산량이 조금 적었는데 김해에 공장이 많이 들어서서 지금은 김해평야보다 많이 나요. 전국 6위쯤 될 겁니다."


■'상주 여행가이드'를 자처한 고향 사랑

경천대의 무우정을 돌아보고 있는 성석제 씨와 문학기행 참가자들.
이때부터 '상주 여행가이드'를 자처한 성석제 작가의 내 고향 자랑이 시작되었고 문학기행이 무르익을 때 쯤 독자들은 그에게 '만물박사' '백과사전' 같은 별명을 붙여버렸다. 사벌주라면 후삼국 시대 아자개가 웅거했다는 곳이다. "삼한 최초의 인공저수지인 공검지도 상주에 있어요. 지금은 곶감 1위(다른 지역에서 상주로 와서 곶감으로 가공된 뒤 전국으로 나가는 양을 합치면 전국 생산량의 90%란다), 꿀 1위, 닭고기 1위, 1인당 자전거 보유대수 1위죠. 2007년 기준으로 연소득 1억 원 넘는 부농 숫자도 전국 최고예요."

자, 여기서 중요한 건 그런 '풍요한 고향'이 작가의 문학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이다. "무실역행 같은 것이라 할까요. 물산이 밑받침된 상주의 분위기와 정신문화는 실속, 실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 집안도 그랬고요. 명분만을 좇거나 공리공담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역사에서 격렬한 갈등이나 분쟁이 벌어졌을 때도 상주에서는 충돌이 적었지요. 삶에 충실한 기풍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였을까. 임진왜란 때 왜적이 쳐들어와 충실한 삶의 근간을 뒤흔들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부딪친 곳도 상주라 한다.

'가이드 성석제'의 안내는 경천대를 시작으로 도남서원~상주자전거박물관~남장사 아래 곶감마을~남장사 등으로 굽이굽이 이어졌다. 특히 나뭇잎보다 열매가 더 많아 보일 지경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곶감마을 감나무의 감들은 보고만 있어도 흐뭇했다. 아름다울 미(美) 자의 어원이 양이 탐스럽게 살이쪄 덩치가 커진 모습을 보고 양 양(羊) 자와 클 대(大)를 합친 것이라더니, 왜 사람들이 먹음직한 것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알 것 같았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정착하면서 시골의 삶을 잃어버리고 필요할 때만 고향의 기억을 떠올리는 성인들이 많다. 문인도 고향을 떠나면 곧바로 '완연한 도시의 감수성'을 대변하는 쪽으로 돌아서버리는 경우도 많다. 작가 성석제는 조금 달랐다. "그럼요! 저의 모든 첫 경험들이 다 여기서 이뤄졌는 걸요. 술 담배 여자 노름…(웃음). 여기서 했던 첫 경험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하거나 그 첫 경험들을 참고 삼아 다른 이야기들을 불러들여서 쓰는 작품들이 많아요." 중학교를 다니던 열 다섯 살에 고향 상주를 떠나 서울에 정착한 작가는 "저보다 아홉 살 많은 형이 앓아 누웠을 때 누나들이 갖다 준 무협지를 읽기 시작해 중학교 1학년이 되기까지 국내 무협지를 모두 독파한 곳도 상주였다. 거기서 출발해 집안에 있던 소설들을 읽고 연암 박지원을 만나 문학의 눈을 떴다"고 회고했다.

그는 "되짚어보니 장편 2편과 단편 10편 이상은 아예 상주와 상주의 경험들로 소설을 썼고 내가 쓴 작품들의 절반 이상이 상주의 직·간접의 영향을 반영했어요. 그래서 상주를 두고 이렇게 농담을 하기도 하죠. '명작의 고향'." 지명도와 작품성에 대한 평가 면에서 그는 언제나 '한국 문단의 대표 현역 작가'군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의 소설들은 독자를 웃기고 울리는 힘이 워낙 강해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읽고 나면 뭔가 사람 사는 이야기를 읽은 것 같고, 시원하고, 힘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매우 중요한 작가이자 최고의 이야기꾼 반열에 올려놓는 독자들도 많다. 그 힘의 근원이 고향 상주에 있었다는 거다.


■"우리 식당에 자주 오는 저 분은 누구세요?"

남장사 아래 곶감마을의 곶감 만드는 풍경. 감 깎는 기계가 이채롭다.
경천대를 돌아보고 나자 점심시간이 되어 일행은 인근 '장마을식당'으로 갔다. 경북 풍의 맛깔난 산채비빔밥과 된장찌개로 일행 30여 명이 밥을 먹었다. 점심이 끝난 뒤 행사를 주관하는 부산문화연구회 김성배 대표가 계산을 마치고 와선 의기양양하게 이야기를 들려줬다. "식당 사장님이 (성석제 작가를 가리키며) '저 분께서 몇 번 단체손님을 모시고 왔는데 오늘도 단체네요. 저 분이 누구세요?'하고 묻기에 내가 '모르셨구나. 저 분은 상주가 고향인 유명한 소설가 성석제 씨입니다. 몇 차례 고향 문학기행을 오셨을 때마다 이 집에 왔군요. 다음 주에도 번역가들과 이 집에 오실 예정이라니까 책도 읽어보시고 사인도 받아놓으세요. 그리고 음식도 더 신경써서 잘 해주세요'라고 했다." 부산 사람이 상주 가서 좋은 일이라도 한 듯, 표정이 흐뭇했다.

작가들이 원체 대중매체에서 얼굴을 자주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서 상주에 왔다 하더라도 그를 아는 사람보다 못알아보는 고향사람이 더 많은 건 자연스럽다. 대신 이번 문학기행에는 성석제의 오랜 팬들이 많았다. 그의 책을 도서관에서 거의 다 읽었다는 독자도 있었고 문학지망생들도 있었다. 순천에서 온 독자도 있었다. 박순봉(44) 씨는 "성석제 씨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 분이 굉장히 내공이 높은 작가인 것 같았다. 자기 철학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풀어먹이는 능력과 글쓰기도 무척 좋아 팬이 됐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참말로 좋은 날' 같은 책을 특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부산에 사는 친구 이희숙 씨가 "중학교 인턴상담교사로 취직해 받은 첫 월급으로 성석제 문학기행 참가비를 쏘겠다"는 제의를 하자 전날 이 씨와 함께 자고 상주 기행에 참가한 길이었다.

상주의 묵밥으로 저녁을 먹고 나니 어둠이 내렸다. 성석제 작가가 말했다. "이 어둠이 예뻐요. 원유처럼 끈적끈적하고 밀도 높은 이 어둠. 그 속에서 가로등이 켜지면…. 서울 살면서도 이 상주 들판의 어둠이 그립고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는 고향 들녘의 깜깜한 어둠까지 사랑하는 작가였다.

신문학기행 참가문의=동보서적 (051)803-8000 부산문화연구회 441-0485 http://문학기행.kr


◇소설가 성석제=1960년 태어났다. 경북 상주시 낙양동이 본적이다. 상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15세 때 서울로 이사했다. 연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94년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중단편 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조동관 약전' '호랑이를 봤다' '홀림'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참말로 좋은 날' '지금 행복해' 등이 있다. 장편소설 '인간의 힘' '왕을 찾아서' '아름다운 날들' '도망자 이치도'를 썼다. 짧은 소설 모음집인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재미나는 인생', 산문집 '맛있는 문장들'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동서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탔다. 한국을 대표하는 '이야기꾼' 소설가의 한 명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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