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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 대원들이 파키스탄 펀잡 히말라야의 고봉이자 세계 제9위봉인 낭가파르바트 정상부 헤드월 암·설벽지대를 통과하고 있다. 정상 등정에 성공한 희망원정대는 목표인 8000m급 14좌 중 9개 봉에 올랐다. |
낭가파르바트(8125m·이하 낭가)는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다음으로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거봉이다. 8000m급 산에 관한 자료와 책도 에베레스트 다음으로 가장 많다. 1856년 독일의 아돌프 슐라킨트바이트에 의해 지질학보고서가 8000m급 산으로는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된 것이 그 계기가 됐다.
비록 높이는 8000m급 14좌 중 9위에 불과하지만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4000~4500m로 에베레스트보다 1000m 높은 등반고도를 자랑한다. 이로 인해 인간이 이 산에서 연출해 낸 휴먼드라마와 처절했던 불멸의 등반사, 그리고 까다로운 등반성 등으로 에베레스트, K2, 칸첸중가와 함께 지구상에서 으뜸가는 명산으로 널리 알려졌다.
벌거벗어 황량하기 그지 없지만 '산 중의 제왕'다운 위엄성과 매력을 가진 낭가. 알프스의 몽블랑을 에베레스트에 비유한다면 낭가는 마터호른에 비교되고, 젊은 등반가들의 불타는 의욕을 실현시킬 수 있는 꿈의 요람이기도 하다.
■"낭가에서 영면한 고미영 대장, 힘을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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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7300m 지점의 캠프4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대원들. |
우리 팀은 고소적응 등반을 마치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다음날 반가운 손님들을 맞았다. 지난해 낭가 등정 후 하산하다 캠프2 부근에서 추락사한 고 고미영의 추모 1주기를 맞아 그녀의 등반파트너였던 김재수 대장과 '고사모(고미영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 등 일곱 명이 그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베이스캠프를 찾은 것이다.
국내 산악계는 물론 국민들을 슬픔에 잠기게 했던 지가 어언 1년이 지났다. 우리 팀과 고 고미영과의 사이는 각별했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주로 히말라야에서였다. 2006년 에베레스트, 2007년 K2와 브로드피크, 2008년 로체, 그리고 마지막 만남은 지난해 5월 마나슬루와 다울라기리1봉 등반 후 카트만두에서였다. 그녀는 히말라야 등반을 위해 출국할 때나 등반을 마치고 귀국할 때면 항상 공항에서 안부 전화를 하는 다정다감했던 여성 산악인이었다.
■강풍 속에서 베이스캠프 출발… 긴장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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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가파르바트 캠프3~캠프4 구간 암벽지대를 통과하고 있는 대원. |
우리 팀이 베이스캠프에 입성한 후부터 9000~1만 m대에 형성된 제트기류는 좀처럼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기압의 영향인지 쾌청한 날씨는 계속 유지됐다. 해발 4200m밖에 되지 않는, 다른 8000m대 산보다 상대적으로 1000여 m 정도 낮은 베이스캠프 생활은 활기로 넘쳤다.
매일 국내에서 보내오는 열흘간의 기상예보에 따르면 정상부의 순간최대풍속은 시속 100㎞에 달해 사실상 등정 시도는 불가능한 상태다. 발토로빙하 지역에서 한국대가 등반 중인 가셔브룸1·2·5봉은 물론 K2도 마찬가지였다. 남쪽에서 온난기류가 형성돼 제트기류를 밀어내 주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일주일 만에 강풍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어쩌면 만용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경험측상 제트기류가 보름 이상 정체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베이스캠프 도착 16일 만인 7월 7일 서성호 김창호 김진태 대원은 베이스캠프를 출발했다. 이틀 전 내린 폭설로 캠프1(5000m) 상단부 암벽에서 흘러내린 눈사태는 텐트를 덮쳤고 데포해 놓은 장비와 식량을 찾느라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이어서 캠프1부터 독일대가 1961~1962년 2년에 걸쳐 완성시킨 킨쇼퍼루트로의 등반이 시작됐다. 캠프1~캠프2는 킨쇼퍼루트 중 가장 힘들고 위험한 구간이다. 초등 당시 이 구간의 깎아지른 험준한 벽에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강철와이어와 자일이, 상단부 100여 m의 암벽에는 줄사다리가 설치됐다.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손쉽게 짐을 올리기 위해 윈치(와이어를 감거나 푸는 장비)를 동원했다.
평균 50도 경사의 가파른 설벽에는 무릎까지 눈이 빠졌다. 태양이 낭가의 북동릉을 넘어 서쪽사면을 비추자 강열한 복사열로 온몸은 땀 범벅이 됐고 눈이 녹아내리자 앞사람의 러셀자국은 여지없이 뭉개지고 말았다. 이렇게 7시간의 악전고투 끝에 설벽과 대암벽을 통과, 캠프2(6000m)에 올라섰다.
밤새 고요함을 유지한 낭가 덕분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대원들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이른 아침 북봉으로 이어지는 설사면을 따라 캠프3을 향해 오르기 시작, 5시간 만에 6850m 지점의 큰 바위 아래에 있는 캠프3에 도착했다. 강풍과 폭설 속에서도 텐트는 건재해 있었다.
다음날 '제트기류가 이틀간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한다'는 기상예보로, 최대한 정상부 아래까지 진출하기 위해 새벽녘에 캠프3을 출발했다. 캠프3~캠프4 400여 m의 횡단구간은 50~60도 경사의 빙·설벽으로 대단히 위험한 곳이다. 만약 실수로 추락하면 2000m아래 디아미르빙하로 곧장 떨어진다. 대원들은 각자의 등반 능력을 발휘해 이 구간을 횡단, 북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설릉을 넘어 세락지대 상단부에 올라섰다. 설원지대에는 하산 때를 대비, 대나무 표지기를 설치하며 정오께 7300m까지 진출했다. 등정 시도를 위해 꼭 필요한 휴식에 들어갔다. 하지만 긴장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만 붙인 채 몇 시간을 보냈다. 해가 저물자 마제노 능선에서 불어오는 강풍은 자정이 지나서야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강풍과 혹한, 암벽 뚫고 마침내 정상 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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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가파르바트 정상부 헤드월의 전경. |
7월 10일 새벽 1시15분께 3명의 대원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찬공기를 가르며 정상을 향한 힘찬 첫발걸음을 내디뎠다. 캠프4~정상에 이르는 구간에는 고정로프가 없다. 로프로 서로 몸을 묶는 안자일렌은 운행 속도가 느리며 대형 사고를 유발할 수도 있다. 우리 팀은 등정 시도 때 항상 각자의 책임 하에 오르는 등반을 해왔다. 이들은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을 번갈아 러셀하며 설원지대를 횡단, 정상부 헤드월 아래로 서서히 고도를 높이며 나아갔다. 새벽 4시께 여명이 밝아와 얼어붙었던 손발이 온기를 되찾자 대원들의 등정 열기는 높아져만 갔다.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지 5시간 만에 정상부 헤드월 중간 7650~7700m에 위치한 바위지대에 당도했다. 이 바위지대는 섬처럼 설벽 중간에 솟아 있어 일명 '아일랜드'라 불린다.
그곳에서부터는 눈이 깊은 쿨와르로 정상부에 진출하는 기존 루트를 피해 정상부 헤드월 우측 피라미드에서 뻗어 내린 암릉으로, 새로운 루트로의 등반을 시도했다. 그러나 눈과 바위로 뒤덮인 암릉상의 혼합등반은 체력소모는 물론 운행은 더 지체됐다. 북봉 너머로 떠오른 태양이 디아미르빙하를 덮었던 산 그림자를 지우며 서서히 정상부로 다가오자 풍향이 바뀌면서 몸을 가눌 수 없는 강풍이 앞을 가로막았다. 강풍을 동반한 혹한은 대원들의 등정 의지를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몇 번이나 등정을 포기하고 돌아서려했으나 두 번 다시 이곳을 오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들은 등정과 하산의 갈등을 거듭하며 거의 탈진 상태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헤드월 상단부에 올라섰다.
오후 1시30분(한국시간 오후 5시30분)께 세 명의 대원은 고소포터와 산소 도움 없이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지 12시간15분 만에 강풍과 혹한 속에서 800여m의 고도를 극복하고 정상에 도달했다. 이로써 서성호 김창호 김진태 대원은 낭가에서의 통산 331~333번째, 국내 26~28번째 등정자로 기록됐다. 특히 김창호대원은 국내 처음으로 낭가 정상에 두 번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등정 소식이 전해지자 새벽부터 숨을 죽이며 망원경으로 이들의 등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베이스캠프 스태프들의 환호는 디아미르계곡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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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 또는 '죽음의 산'으로 불리는 낭가파르바트 정상에서 2010 다이내믹 부산 희망원정대 김창호(왼쪽) 서성호 대원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정상은 수십 명이 족히 설수 있는 평탄한 곳이었다. 장엄한 카라코람과 힌두쿠시 산군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느 방향을 보아도 산들의 바다였다. 그 아래로 이름 모를 수많은 빙하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동안 올랐던 K2와 브로드피크, 그리고 가셔브룸1·2봉이 구름위로 우뚝 솟아올라 이들을 반겼다.
그러나 낭가 정상을 강타하는 모진 바람은 등정의 기쁨을 누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정상에 올랐다는 증거로 몇 커트의 주위 풍광만을 촬영했을 뿐 배낭에 있는 깃발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산은 등정보다 더 중요하다. 이들은 정상에서 10여 분을 머문 후 또 한 번 각자 살아남기 위한 등반을 시작했다. 초등자 헤르만 불도 그랬듯이 어둠이 내릴 즈음 초죽음이 되어 마지막 캠프로 돌아왔다.
고 정성백 고미영 메모리얼 케른에 야생화가 놓이고 향이 피워졌다. 먼저 간 두 악우에게 이별을 고했다. 우리는 살아남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행복감에 젖어 낭가를 뒤로한 채 디아미르계곡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양과 염소들이 노니는 초원지대의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20여 일 전보다 그 모습을 한층 더 발하며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 한국 산악계, 처절했던 낭가파르바트 도전사
- 1983년부터 도전해 10년만에 초등
- 고미영 대장 등 산악인 4명 사고死
승려 혜초와 고선지 장군이 낭가 산군을 본 후 낭가는 우리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재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바로 히말라야를 동경하던 산악인들이었다. 한국 산악인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83년으로, 1953년 헤르만 불이 초등정한 지 30년이 지난 후였다. 서울의 청화산악회가 루팔벽과 디아미르벽을 정찰한 것이 한국인 최초의 낭가 진출이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88년 (사)한국산악회 합동대가 처음으로 낭가 주봉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등반 적기를 놓쳐 기상 악화와 잦은 눈사태로 패퇴했다. 하지만 같은 해 고룡산악회팀이 낭가 주봉의 정찰을 겸해 북동릉상의 위성봉 라키오트 피크(7070m)에 도전, 두 명의 대원이 정상에 오르는 성과를 거뒀다.
1989년에는 전주대학교산악회 팀이 서쪽면 디아미르벽으로 도전했으나 김광호 대원의 추락사로 낭가에서 한국 산악인 최초의 희생자를 내면서 실패했다.
이듬해 (사)대한산악연맹은 과감하게 세계 최고의 암벽인 루팔벽 한스쉘 루트에서 등반을 시도하지만 계속되는 악천후로 결국 7350m 지점에서 통한의 후퇴를 단행했다.
2년 후인 1991년에도 두 팀이 디아미르벽으로 도전했다. 울산 현대공고산악회 팀은 악천후로 장기전이 불가피해지자 등반을 포기하고 말았다. 한편 서울 은정산악회 주축의 한국-홍콩 합동대는 김형주 대장과 홍콩인 두 명이 정상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1988년 이후 한국대에 여섯 차례나 패배를 안겨줬던 낭가 등정은 1991년 히말라야 등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로 꼽혔다. 그러나 이 팀은 증거 미비 등으로 등정 의혹을 불러일으키다가 이듬해 등정한 한국 팀들에 의해 정상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밝혀져 안타까움을 샀다.
이러한 등정 의혹 제기로 한국 산악계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낭가는 1992년 한국 원정대 다섯 팀으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는다. 루팔벽 쪽을 선택한 서울-의정부 합동대가 한스쉘루트를 통해 6000m까지 진출하지만 폭설과 강풍으로 등반을 단념했다. 디아미르벽 쪽으로는 광주 우암산악회, 경남합동, 서울시산악연맹, 조대공전산악회 등 네 팀이 등반에 나섰다. 이들은 합동으로 킨쇼퍼루트를 공략한 끝에 경남팀 대원 두 명과 우암팀 대원 한 명이 함께 정상에 올라 한국 초등을 이루었다. 1983년 낭가에 처음 발을 디딘지 9년 만에 2명의 희생자를 내고 얻은 성과였다.
이후 2009년 여성 세계 최초 8000m급 14좌 완등 레이스를 벌였던 블랙야크팀의 오은선과 코오롱첼린지팀의 고미영에 이르기까지 많은 등반대가 이 산에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다. 한국 원정대는 1988년부터 2009년까지 22년간 21개 팀이 도전 11개 팀이 등정에 성공, 총 25명의 등정자를 배출했으며 사고로 네 명(고 김광호, 정성백, 안춘문, 고미영)이 희생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대부분의 한국 원정대가 낭가의 노말루트라고 불리는 킨쇼퍼 변형루트로 등정에 성공한 반면 2005년 광주·전남 산악인 주축의 '한국 낭가파르바트 루팔대장벽 원정대'가 낭가 최고 최난의 벽인 루팔 중앙벽 직등루트로 등정에 성공, 한국 산악인의 위상을 드높였다. 당시 우리 팀의 김창호 대원이 이현조 대원과 함께 정상에 섰다. 이후 두 대원은 디아미르벽으로 하산, 9일 만에 횡단등반에 성공했다. 1970년 라인홀트 매스너가 초등한 이래 35년 만의 재등이었다. 당시 한국 산악계는 '한국 알피니즘의 역사에 새 장을 연 쾌거'라고 높이 평가했다.
※ 협찬 : 경남정보대학, mont-bell, DRB 동일